물거품 같은 영상을 끌어안고 오늘도 하루해를 허덕이는 사람이다. 모든 것들이 스치듯 사라져 가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부여잡고 하루해를 허덕이는 사람이다. 어제의 그것들이 오늘에 와서 구름처럼 사라지고 오늘의 이것들도 내일이 오면 구름처럼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운명이라는 큰 터울 속에서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그렇게 하루해를 허덕이는 나그네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아가고 사람답게 자리도 하고 싶었지만 욕망과 고뇌는 그토록 나를 필요로 하였던 것일까? 운명의 터울을 살펴야 할 겨를도 없이 막연한 마음으로 순간의 죄(罪)를 지었다고 하겠지만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니 한 터울 속에 갇힌 작은 새처럼 오늘도 그렇게 허덕이는 사람이다.

운명은 사람을 따라서 천리길을 왔을까 아니면 세월을 따라서 천리길을 왔을까? 언제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끝나는 그날이 오겠지만 이제는 운명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 저편에서 전율돼 흐르고 있다. 위대했던 젊은 날이 그리워지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이 그리워질지라도 운명의 터울은 세월과 함께 하염없이 흐르고 있을 뿐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무릇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공(空)의 이치 속에서 찾으라 하시던 옛 성인의 말씀이 아름다운 시간으로 지나고 한적하고 쓸쓸한 마음속에서 힘겹게 한 말씀을 떠올려 본다. 또 세상의 모든 일들을 허무(虛無)의 자리에서 찾으라 하시던 옛 성현의 말씀이 화려한 시간으로 지나고 쓸쓸함이 거울처럼 비춰 지는 오늘에서야 힘겹게 그 한 말씀을 떠올려 본다.

공(空)의 굴레가 천명(天命)이 되고 허무의 굴레가 천명(天命)이 되는 지를 뉘라서 쉬이 아오리까마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만나는 그것들이 있다. 그리고 어쩔 수가 없는 천명(天命)에서 허무와 만나야 하는 까닭이 슬픔일까? 그러나 허무는 아쉬움이 아니고 공(空)은 슬픔이 아니다.

세상사는 본래가 공(空)이요 세상의 묘리(妙理)는 허무(虛無)속에 있다. 모름지기 고독을 즐길 줄을 아는 사람에게는 고독이 값진 것이지만 고독을 두려워한다면 고독은 슬픔일 뿐이다. 하물며 공(空)과 허무(虛無)의 진리(眞理)가 무엇 때문에 슬픔이고 아쉬움이 되겠는가? 다만 유(有)의 자리에서 바라다보니 공(空)은 두려움일 뿐이고 공(空)의 자리에서 바라다보니 유(有)에는 고통스러움이 많다.

대저 천명(天命)아래에서는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천명(天命)의 가르침을 깨우치는 사람이 드무니 하늘이 슬퍼하고 사람이 함께 슬퍼한다. 그래도 이생에서 좋은 국토를 만나서 좋은 운명을 누렸고 좋은 스승을 만나서 좋은 인연을 누렸으며 좋은 마음을 만나서 오랫동안 남겼다하니 슬픔이 반이라면 기쁨도 반은 될 것이다.

어차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은 천명(天命)이요,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은 나그네다. 그런데 오늘도 물거품 같은 영상(影像)을 끌어안고 스치듯 사라져가는 터울 속에서 무엇 때문에 하루해를 허덕이는 나그네인가?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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