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나눠 가지게 되고 지상의 감미로운 맛들도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즐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서로가 내 것이라고 시시비비를 가릴지라도 모든 것은 자연(自然)의 권리와 세월의 소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의 운명과 인연도 운명과 인연 속에서 머물고 세상의 이치도 이치(理致)속에서 머문다.
 

그래서 이치가 모이는 곳에는 모일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릇 무(無) 가운데서도 유(有)가 있고 그 유(有)속에는 또다시 무(無)가 있는 법이니 세상 어느 곳엔들 '없다'라 하고 '있다'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없다'도 없고 '있다'도 없다. 다만 그렇게 존재를 하고 작용을 하며 교류(交流)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치라하고 영원(永遠)의 세계라 한다.
 

그러므로 이치(理致)가 영원의 세계에서 존재를 하고 영원의 세계가 또한 이치 속에서 존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주계에서 보면 공평한 법칙이고 은덕이며 분배가 되고 감응이 되는 것이며 인간계(人間界)에서 보면 공리가 되고 명분이 되며 형태가 되고 물(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우주의 이치가 무(無)의 법칙에서 유(有)가 생겨났음을 알고 유(有)속에는 또 다시 무(無)가 존재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어서는 법을 알지라도 "모른다"라고 답을 하고 구하는 법을 알더라도 그냥 "모른다"라고 답을 한다.
 

한편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라도 내 것과 우리 것 그리고 소유(所有)와 권리(權利)가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잠깐의 세월을 빌려서 쓰다가 되돌려 줘야 하는 의무(義務)와 책임(責任)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잠시의 권리에도 의무가 생겨났고 잠깐의 소유에도 책임이 생겨난다.
 

역(逆)으로 보면 권리가 없는 가운데에는 의무가 없고 책임이 없는 가운데에는 소유가 없다. 이와 같은 세상의 이치가 또한 공리(公利)의 법칙을 낳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평(公平)의 원리가 발생을 하고 공평의 원리 속에서 공리(公利)의 아름다움도 생겨나는 것이다.
 

올라가서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공평에서 벗어났음이고 내려가서 책임만을 추궁당하는 것도 공평에서 벗어났음이다.
 

그리고 구하고서 소유만을 주장하는 것도 공리에서 벗어났음이고 없는 가운데에서 의무만을 추궁 당하는 것도 공리에서 벗어났음이다. 이러한 법칙을 스스로가 세워 나갈 때에 내 안의 의미가 새롭게 보이고 존재가 새롭게 나타나며 내 안의 실체도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을까? 하는 존재(存在)를 설정하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의미(意味)를 부여하며 왜 존재하고 왜 주어졌을까? 하고 실체(實?)를 명확히 하는 것은 내 존재에 대해 의무요 권리이며 소유요 책임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존재 속에서 공리(公利)의 법칙을 세우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이 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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