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필장 21 유필무

- 이 시대 장인의 처절한 삶과 정신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항아리에는 황모필(黃毛筆)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추운 겨울날 스님이 황모필로 ‘염송설화’라는 불경을 스물아홉 권이나 집필하고 마지막 한 권을 집필해야 하는데 붓끝이 달아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었다.
폭설이 내리고 길이 끊어져 붓을 장만해 올 방도가 없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며칠 후, 스님이 아침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족제비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족제비는 스님의 절간을 매일같이 드나들고 있었는데 스님의 근심거리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생명을 바쳐 자기 몸을 보시한 것이다.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을 일컫는 황모필은 만드는 기술부터 간단치 않다. 족제비 꼬리털을 푹 쪄서 잘 말린 다음, 재로 문질러 기름기를 빼내야 한다. 그리고 털을 통 속에 넣어 원추형의 붓털모양으로 만든 다음, 붓털의 기부(基部)를 실로 동여매고 인두로 지져서 고정을 시키고, 그것을 다시 붓자루에 끼워 풀로 붙여야만 황모필이 된다.

스님은 황모필을 만든 다음 족제비 시체를 소중히 거두어 다비를 해주었다. 다비의 불길이 다 꺼지고 아침이 되자 햇살에 영롱히 빛나는 사리를 발견했다. 이 책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집필할 때는 붓 중의 붓이라는 ‘황모필’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체가 갖는 삶의 참다운 가치란 무엇인가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붓은 철학적, 미학적 삶의 메타포

문방사우(文房四友). 종이·붓·먹·벼루의 네 종류의 문방구를 일컫는다. 이 중 붓에 대한 문화적 가치는 단순한 기록을 위한 재료로서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서양의 펜이 단단함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동양의 붓은 부드러움이 특징이다.

우리의 전통 붓은 끝이 뾰족하고, 가지런하며, 털이 모인 형태가 둥글고, 튼튼한 것을 높이 쳤다. 조선 선비들이 가장 선호한 붓은 족제비의 꼬리털이 부드러운 양털을 곁들여 만든 황모필(黃毛筆)이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붓이 널리 쓰여져 왔지만 한국의 그것은 기능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철학적, 미학적 메타포를 갖고 있다.
붓은 짐승의 털과 대나무나 갈대와 같은 식물을 사용하여 만들어낸다.
붓을 만드는 과정은 수십여 차례의 손질을 거칠만큼 복잡하고 힘든 작업이다. 털을 골라 빗질하고 기름을 8번 제거하며, 털의 앞쪽을 가지런히 한 후 재단하여 체질하고 뒷털을 가지런히 한 다음 모양을 낸다. 저울로 무게를 잰 다음 의체를 씌우고 도모질을 하고 물을 묻혀 끝을 본 후 건조시키고 초가리를 해서 묶는다.
각통에 초가리를 맞추고 붓대의 속을 파서 붓촉을 끼우며, 동을 씌워 풀을 먹인 후 건조시키고 뒤꼭지를 끼워 완성하는 것이다.
-1만5000번 두드려야 붓이 만들어지는 초필

유필무 작가(48·사진)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붓과 인연을 맺으면서 30년 넘게 붓쟁이로 살아오고 있다. 그동안 동물의 털로 붓을 만드는 기능을 물론이고 태모필을 상품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최근에는 풀잎으로 붓을 만드는 초필작업에 몰입하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초필은 사람의 손으로 만 오천 번을 두드려야 붓의 총이 만들어지는 고단한 작업과정이 필요하다. 한 자루의 초필이 만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3개월이나 된다.
그래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붓쟁이들도 초필 작업을 하지 않고 동물의 털만을 이용하는 것이다. 작가는 일찍이 붓의 소중함과 귀한 쓰임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험난한 노정을 마다않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모필기법 역시 빼어나다. 갓 태어난 아이의 머리털을 잘라 붓으로 만드는 모필은 원모선별, 지방질 제거, 초벌정모, 재단, 배합, 재벌정모, 작편, 물끝보기, 필관 맞추기, 접착, 풀먹이고 빼기 등 30여 과정을 거쳐야 하며 250여회의 손길이 필요하다. 철저한 장인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과정이다.

유필무 작가는 명장중의 명장이다. 붓을 만드는 기술을 스스로 터득해 왔으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기예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혼을 담아 창작활동을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삶의 고단함과 서구문명의 밀물에 대부분의 붓쟁이들은 등을 돌렸지만 유필무 작가는 꿋꿋하게, 이 길만이 자신의 삶 전부라는 철학으로 지금까지 달려왔다.

작가는 말한다. "내가 매는 붓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정을 하고, 치밀하고 내면의 영혼을 다 바쳐 완성시킨다. 부드러운 붓, 강한 붓, 날카롭거나 후덕하거나 붓의 능력은 만든 사람의 거울이나 다름없다. 쓰는 사람의 손에 맞으면 좋은 붓이고 손에 맞지 않으면 나쁜 붓이지만 그 속에는 내면의 은밀함과 따뜻함이 숨어있다. 그것이 영혼이다"
이같은 열정 때문에 유필무 작가가 만든 붓은 다른 붓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붓끝의 섬세하고 미세한 울림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한다. 한 번 사용한 사람은 반드시 선생의 붓을 찾게 마련이다. 마음으로, 혼을 다해 붓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혼으로 만든 붓 천자루
작가는 눈만 뜨면 일하고, 먹고 돌아앉으면 일하고, 졸릴 때까지 일한다. 16세 어린 시절부터 이 짓을 했으니 이골이 날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게으름 피운 적이 없다. 값싼 중국산에 작가의 붓이 팔리지 않아 마음고생 많지만 그럴수록 더 좋은 붓, 더 귀한 붓을 만들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 한다. 이것이 붓쟁이 유필무가 할 수 있는 삶의 전부인 것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삶이 고단해도 작가는 늘 부자라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 일 부자인 것이다. 청원군 문의명 마동리 작업장 일원에는 지천으로 재료가 넘쳐난다. 평생을 해도 손도 못 대어 볼 만큼 종류가 많다. 대청호변에는 억새창고, 뒷산에는 칡창고, 들에는 볏짚창고나 다름없다. 세상이, 자연이 온통 재료와 창작 소재거리다.작가는 오늘도 이렇게 부자로 살게 해 준 자연과 세상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붓 만드는 일에 정진하고 있다.
/변광섭 객원논설위원(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 작가프로필
충주생(1960) 붓작업 입문(1975) 충북도지정 우수공예인(1996)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제작시연(여의도 종합전시장·1997)
천년의 향기 초대전. 설치 공예전 퍼포먼스(독립기념관·1998)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초대작가전 및 배달겨레대제전 초대전(1999)
청주출판인쇄박람회 제작시연(32일간·2000)
우수공예 문화상품 100선 선정(공예문화진흥원·2001)
문방사우기획전 초대 천공(天工)의 솜씨를 찾아서(무형문화재전수회관?2001)
직지어울마당 제작시연 체험행사 초대(2004), 울타리 없는 모임 자유의지전(공주문예회관)
민속공예품 풀질 인증획득(충북 중소기업청·2005)
한국공예관 기획전 직지와 사람들(청주시한국공예관·2006) 충북의 젊은작가 초대전(청주시한국공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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