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회 청주시 용담명암산성동장]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팔월 한날 푸른 벌판을 뜨거운 함성으로 달궜다. 이미 장년을 넘어 중년으로 접어든 사촌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자리를 마련했다. 흔히 하는 음식점에서의 조우가 아니라 고향의 들판에서였다.

족구시합을 시작으로 달리기, 2인 3각 경주 등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뒹굴었다. 마음엔 하늘도 날 것 같은데 몸이 잘 따라 주질 않는다. 우리 7남매와 외사촌 7남매가 한데 어우러져 경기를 하니 여기저기서 환호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사촌끼리 단합대회 날을 잡아 놓고 필자는 마음이 많이 설렜다. 어릴 때 함께 했던 사촌들이 결혼으로 늘어난 식구들을 데리고 모두 모이니 더욱 그랬다. 어려서부터 우리들은 참 각별했다.

시골 이웃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라 같은 학교를 다녔고 학년도 비슷비슷했다. 우리가 각별하게 지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엄마와 외삼촌으로부터 시작된다. 엄마와 외삼촌은 사실, 사촌 간이다. 외할아버지가 엄마 두 살 때 돌아가셔서 사촌 오빠 집에서 살았단다. 그 오빠도 스물이 되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사촌 남매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단다.

그 후 엄마는 호적도 사촌 오빠의 동생으로 입적돼 명실상부한 오누이가 됐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단 한 번 다툰 기억 없이 친남매 이상으로 사이가 좋아 이런 부모님들의 삶이 우리 사촌들까지 각별한 관계로 살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밭에 가시고 안 계셔서 사촌 언니와 같이 밥을 하다가 새까맣게 태워 엉망이 된 가마솥 앞에서 둘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려운 형편으로 당신들은 헐벗고 힘들게 살았지만 자식 사랑과 교육 열정이 남달랐던 부모님들 덕분에 열넷 남매가 지금까지 사회에서 뒤처짐 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교를 청주로 유학 오면서 필자는 기거할 곳이 없었다. 어려운 살림에 자취방을 구할 여력이 되지 않아 사촌 언니와 동생 셋이 자취를 하고 있는 방에 얹혀살았다.

사촌 언니는 친동생들과 나를 구분하지 않고 때마다 밥을 해 먹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몇 년 전 언니와 함께 자취했던 그 집이 하도 그리워서 찾아 나섰는데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삼십 년이 훨씬 지난 세월이 모든 것을 변하게 했나 보다.

새벽이면 세광고 야구 선수들의 구령 소리가 들리던 탑동 호두나무 고개였다.

원불교 앞으로 걸어 등·하교를 했는데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는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의 마음을 참 행복하게 했었다. 그렇게 함께 공부했던 언니와 내가 이젠 퇴직을 앞두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외삼촌과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할 일만 다 마치고는 자식들의 효도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우리 열넷 남매가 함께 하는 모습에 흐뭇해하시는 엄마와 외숙모를 보면서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아버지, 외삼촌! 보고 계세요? 저희 참 잘 살고 있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 함께 신나게 달려보고 싶은 고향 들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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