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주
개인의 역할이 보편적인 사회적 가치가 인정될 때 이는 역사적 역할이 된다.
필자가 현재까지 10여년 이상 조사 확인한 결과 충북에는 총 23개의 구곡이 설정됐다.
상당 수가 화양구곡이 완성된 이후,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설정된 것이며, 강원도 일부와 기호지방 전역에 걸쳐 설정됐다.
왜 이렇게 이 시기 구곡설정이 급증했을까?
이는 사상적 시국적으로 당시 사림(士林)들의 특수한 목적의식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즉 구곡은 그 시대 상황하에서 화서 이항로(李恒老1792~1868)계열 사림(士林)들이 지역의 사림들을 결속 교육하고 항일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도통계승(道通繼承)의 상징으로 설정했다.
도통계승이란 도학(道學)의 연원(淵源), 즉 유학의 도를 계승전수하는 것이다.
기호사림에 있어서는, 주자 · 율곡 · 우암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연원을 정맥으로 삼고있다.
이 시기 이들의 존화양이·척사위정론으로 집약된 도통연원(道通淵源)의 계승양상은 3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이들은 항일투쟁을 적극 전개한다.
유중교(1832~1893)와 류인석(1842∼1915)이 주동이 되어 제천에서 을미년(1895년)에 거병한다.
둘째, 이들은 항일의병항쟁을 위한 교육과 집회장소로 활용하고, 도학계승의 표상화로 삼기위해 심산유곡에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시를 지었다. 우암을 숭상한 이항로가 벽계구곡(蘗溪九曲)을 설정한 후, 그 계열 사림들은 상당 수 구곡을 설정했다.
유중교는 옥계구곡(玉溪九曲), 이근원(1840~1918)는 금리구곡(錦里九曲)을 설정했다.
화서계열 사림 박세화(1834~1910)는 1898년 용하구곡(用夏九曲)을 설정했다.
맹자의 용하변이(用夏變夷) 즉 중국 하나라의 문명을 응용해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구절을 구곡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존양화이와 척사위정의 도통의식을 구곡의 명칭에 명확히 표명한 것이다.
셋째 교육과 학문을 통해 구국활동에 동참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창건한다.
유중교는 1889년 제천시 공전리 장담에 자양서사(紫陽書祠)를 건립하였다.
우현정(1871~1935)은유교의 도를 계승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06년 괴산군 사담리에, 연원화숙(淵源和塾)을 설립했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들은 세 가지 유형 중 한 가지를 구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두 가지나 세 가지를 겸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화서학맥 사림들은 선비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시대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최근 경제위기가 몇 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내용과 권력과 결부된 친인척 비리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각 분야별로 해결할 과제들에 대한 보도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산적한 현안들을 식견을 구비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구곡가(九曲家)들을 능가하는 투철한 시대정신으로 역사적 역할을 혁혁하게 수행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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