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 수필가] 하늘은 높푸르고 오곡백과를 거두어들이는 분주하고 풍요로운 계절이다. 봄부터 씨 뿌리고 불볕더위와 심한 가뭄 속에서도 땀 흘려 가꾼 곡식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인지 논밭을 보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우연히 도시에서 살면서도 주말농장보다 조금 큰 밭농사를 지어 보니 땀의 소중함을 더욱 알게 되고, 곡식 하나하나가 마치 땀방울이 모여 곡식이 되고 과일이 되는 것 같다.
 
매제(妹弟)네 밭일이 바쁠 때 도와주러 몇 번 다니니 작은 밭 한 뙈기를 부쳐보라고 했다. 청주에서 멀고 돌도 많은 천수답 같아 트랙터로도 갈지 못하는 땅이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안 하면 묵밭이 된다기에 운동 삼아 해보기로 했다. 틈틈이 가서 돌을 주워내고 생땅을 괭이로 파다보니 힘들었지만, 한번 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끝을 보는 근성으로 이것저것 심어보았다. 이것도 농사라고 많은 시간과 땀을 들여야 했고, 우스꽝스런 일화도 많았다.
 
자갈 둑에 힘들여 구덩이를 파고 흙과 거름을 넣은 후, 집에서 울밑에 호박 모종을 길러 심으러 가보니 호박이 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절로 난 것이려니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수소문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이해를 시키고 모종을 해 잡초와 잡목을 뽑고 깎아주며 가꾸니 신기할 정도로 나름대로 덩굴을 뻗었다. 갑자기 짓는 농사라 씨앗 준비도 안 되어 집에 있던 녹두씨와 콩나물콩 그리고 일손이 제일 적게 들 것 같은 들깨를 심었다. 부근의 논밭에는 경운기, 트랙터 등으로 쉽사리 경작하지만 나의 주말농장(?)은 괭이와 삽으로 파일구어야 하니 '사서 고생한다. 기름 값으로 사먹는 것이 낫다.'는 아내의 푸념에도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땀 흘리는 보람은 있었나 보다. 밭에 갈 때마다 무공해에 가까운 상추, 아욱, 토마토, 애호박 등 선물보따리로 위안을 삼으며 다녔다. 언젠가 우선 익은 녹두를 따서 옥상에 널었더니 마구 흩어져 있어 모처럼 온 손주와 까치·비둘기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꼬투리가 저절로 튄 것이 아닌가!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자주 다닐 때는 그런대로 제법 밭 같은데, 바쁘고 멀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가면 그야말로 산달밭이 따로 없었다.
 
논밭에서 벼를 베고 곡식을 수확하느라 한창이다. 우리도 가을걷이를 하러 가보니 벌써 콩이 튀기도 하고, 애타게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밭둑을 지키던 늙은 호박, 익는 대로 따야 되어 부지런한 사람이나 심는 녹두, 여물은 후 튀기 전에 베어야 하는 콩과 들깨, 콩밭에 띄엄띄엄 심어놓은 옥수수, 밭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대파와 상추와 아욱, 된서리 오기 전에 따는 지고추… 손이 모자라고 해가 짧아 금방 어두워 밤에 퇴근(?)을 해 피곤했지만, 마음은 넉넉하고 푸근한 것은 봄부터 땀 흘린 덕분에 찾아온 가을걷이의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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