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시인·희곡작가]  경주 최 부잣집의 마지막 주자 최준이 1884년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로도 이미 비극을 떠안고 있는 셈이었다. 그 해는 갑신(甲申)년이었기 때문이다. 즉 갑신정변과 한성조약이 잇달아 터져서 일본의 마수가 나약한 조선왕조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준이 다섯 살이 되고부터 과거시험에 급제한 독선생을 곁에 두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훗날 경서와 사기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10세가 되던 해인 1894년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발발하는 거대한 시대의 물결에 나라와 그 집안이 휩쓸려 소용돌이쳤다. 15세쯤 그는 면암 최익현을 만났다. 그로부터 국가 운명과 새시대의 교육과 험준한 역사와 나라의 미래에 대한 큰 가르침을 받고 새교육에 대한 뜨거운 소망을 품었다. 마침내 그가 21세 되는 해 을사년 (1905)과 맞닥뜨렸다. 을사조약은 조선왕조가 목까지 침몰되는 재앙 속에서 그는 만석꾼의 살림을 인계 받았다. 그 때문에 신학문의 기회를 잃었다. 뒤이어 경술국치가 덮쳤다. 기어코 오백왕조가 비통하게 침몰 당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적인 죽음의 터널을 지나야했다.

그 와중에 그 집에는 참으로 많은 유명인사가 다녀갔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천민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 백산 안희재, 인촌 김성수, 의암 손병희, 육당 최남선 심지어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가 경주의 서봉총을 발굴 할때 최 부잣집에 머물렀다. 1920년 최준은 경주 유지들과 경주 고적보존회를 설립해 그 회장을 맡았는데 그것은 훗날 경주 박물관으로 발전했다. 그로인해 구스타프와도 인연을 맺은 것이다. 신돌석은 그에게 망국민으로서 불타는 애국심을 가슴에 가득 담아 줬다. 의암과 육당으로부터는 민족의 거대한 함성 3·1운동의 뜨거운 정신을 한껏 짐 지워 줬다. 백산과 최준은 일생을 걸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고받는 인생을 엮으며 민족 최대의 수난기를 함께 겪었다. 백산은 신교육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2000 두락의 전답을 모두 팔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세웠다.

그 상회에 최준이 합세해 전국 내지 만주에까지 확장했다. 최준은 그곳에 100만 원을 내놓았고 사장에 올랐다. 백산은 그 상회에서 나오는 이익금의 대부분을 상해 임정으로 빼돌렸고 별도로 독립자금을 모아 백범 김구에게 비밀리에 전했다. 최준이 가장 많은 자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백산상회는 110만 원의 엄청난 빚을 지고 파산했고 백산은 일제에 체포 구타당한 채 광복을 2년 앞두고 순국했다. 그로인해 최준은 거대한 재산을 잃었다. 광복 후 최준이 경고장에서 백범을 만나자'인명기록장'을 내놓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백산을 통해 내놓은 그 많은 독립자금과 백산상회를 통해 건너간 자금이 한 푼도 틀림없이 적혀있었다. 최준은 감탄했다.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최준은 남은 재산을 모두 대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을 세우는데 받쳤다. 국보급 보물 미술품과 귀중도서 1만권도 심지어 경주 거대한 저택도 다 내놓았다. 그리고 1870년 89세로 세상을 떠났고 훗날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참으로 비장한 아름다움의 표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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