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4월의 햇살이 말갛게 부서져 내리고 있다. 점심 무렵 친구 셋이서 불현듯 문의문화재단지를 찾았다. 대청호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마루에 널찍이 자리를 잡고 있다.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가슴 한켠, 수몰마을의 사연을 지그시 누르며 이 시대를 끌어안고 있음을 알기에 애잔한 마음도 든다. 양성문을 들어서서 맨 먼저 찾은 것이 신동문의 시비(詩碑)이다. 발걸음 한 목적은 바로 이 시비를 보기 위함이었다.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이어서 서 남 북/거리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쥔 채/ 떼 지어 나온 젊은 대열/ 아! 신화같이/ 나타난 다비데군들//

  혼자서만/ 야망 태우는/ 목동이 아니었다/ 열씩/ 백씩/ 천씩 만씩/ 어깨 맞잡고/ 팔짱 맞끼고/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아! 새로운 신화 같은/ 젊은 다비데군들//  (중략)

  시인의 가슴을 통해 4·19의 절규가 하얗게 쏟아져 나와 아로새겨 있다. 그가 서울에서 직접 4·19 의거에 참여하여 쓴 시라고 한다. 1960년 당시 나는 겨우 아장걸음을 걸을 때였지만 그날의 상황을 눈으로 본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절절한 마음에서인지, 그림처럼 묘사한 시인의 필력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4.19의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시로 꼽히고 있다.

  신동문은 1927년 문의면 산덕리에서 태어나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어 문단활동을 하게 된다. 격동의 세월, 수난의 역사에 맞물린 그의 삶이 그러하듯 문단생활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6·25 전쟁에 참전을 했고, 4·19의거에 동참도 하면서 반전, 현실 비판적 참여시로 5·16군사 정권에 맞선다. 급기야 필화사건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고 절필하기에 이른다.

  그는 "5·16 군사정권에 맞서는 자신의 詩도, 자기 자신도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단양 수양개 마을에 가서 농장을 하며 침술봉사로 생을 마친다. 그가 택한 곳이 왜 하필 단양이었을까? '노래하는 침방' 그에게 따라붙은 별호다.

  시인의 생가와 마을 일부는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고, 그의 시비만이 대청호반을 바라보며 흔적으로 남아 있다. 문의문화재단지는 수몰된 문의마을의 민가와 낭성민가, 토담 등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 형태와 여막, 대장간, 문산관, 미술관, 민속자료를 두루 갖추어 놓았다.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가 말년에 머문 수양개 마을 역시 충주댐공사로 인해 수몰됐다. 수난의 역사 속에서 침잠된 그의 예순 여섯의 일생, 그 자체가 우리나라 굴곡진 역사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올해로 4·19의거 56주년을 맞는다. 시비 앞에서 수몰되어 있는 그의 정신세계를 헤아려보며 멀리 시선을 던진다. 대청호반에 내려앉는 4월의 햇발이 눈부시다. 이제 곧 여린 초록이 다비데군처럼 몰려와 온 산야를 짙푸르게 일으켜 세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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