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김재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국제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20대 총선으로 새로운 국회의 모습인 3개당 체제로 바뀌면서 국내외적으로 어려움 속에 28일은 성웅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이다. 장군께서는 1545년 한성 건천동(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고려 왕조 때 중랑장 이돈수의 12세손 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 이변의 후손이다.

 1576년(선조 9년) 32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900여 회에 걸친 외침을 받아온 시련과 피눈물의 역사를 가졌다. 청 태종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내침한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지금의 송파인 삼정도에서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리고 60만 명이 조국을 뒤로 한 채 만주로 끌려 가야했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로 북상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해야 했다.

 이순신 장군은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에서 큰 전과를 올려 해상권을 장악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했고,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왜군을 격퇴시킨 장군께서는 모함에 의해서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파면 당하였다 재기용되었으나 전선은 12척만이 남아 있었다. 장군은 임금에게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서해로 향하는 적선을 명량해전에서 대파시켰으나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싸움이 한창이니 나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전사하셨다. 장군께서는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전쟁에 임하시어 이 나라 이 민족을 7년 전쟁에서 구하셨다.

 좌전에 거안사위 사즉유비 유비무환,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면 대비를 하게 되고, 대비를 하면 걱정거리가 안 생긴다"고 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가운데 충무공의 탄신일을 맞게 되니 장군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떠올리며 모든 일에 거안사위의 자세로 임하면 무한경쟁의 글로벌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북한의 핵무장에 대비하여 국민의 안보의식과 국방력을 강화하면 안정 속에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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