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탁 충북보건과학대 교수

[김종탁 충북보건과학대 교수] 늘 갈등과 고통이 상존하는 사회생활에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용기 있게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사람이 품고 있는 소신이라는 게 그 시대의 흐름이나 기조에 정면으로 배치돼 충돌할 수도 있고 시류와 편승해 영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은 절개의 소신이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들과는 의리의 상생이지만 현실과 어긋날 수도 있고, 반목하는 무리들에겐 현실과는 영합되지만 간신일 수밖에 없다. 굽히지 않는 집념과 용기가 강할수록 고통은 따르지만 쓰임새 있는 큰 그릇이 되고 약할수록 고통 없는 작은 그릇이 된다.

 개원의 치(治)를 이룬 당나라 현종 때, 한휴라는 재상은 주관이 뚜렷하고 강직해 현종의 잘못을 면전에서 직언하고 올곧은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현종의 마음은 늘 편치 못하고 재상의 눈치를 봐야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떤 이가 현종께 아뢰기를 "내치면 그만인 것을 왜 그리 안절부절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나는 한휴 때문에 하루도 즐겁지 않고 잠도 편히 잘 수 없어 몸이 상해가지만 그 대신에 천하의 백성들이 살찌고 있지 않은가"라고 답했다. 그랬던 현종도 말기에는 듣기 좋은 말로 현혹하고 눈과 귀를 막아주는 간신들과 가까이 하면서 결국 안록산의 난을 자초해 황제의 자리를 잃고 말았다.

 시세나 권력의 주변엔 늘 아첨하는 간신들이 득실거리기 마련이다. 만고에 밑천 한 푼 안 드는 기술 중 으뜸이 아첨이다. 사람들은 아첨을 일컬어 간신배나 소인배들의 천박한 짓으로 폄하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기술 중 고난도이자 가장 미학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간신들의 음해만 없었더라면 비극의 역사는 반으로 줄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들은 그게 안 된다. 왜냐하면 소신 있는 직언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관의 치(治)로 불리는 당 태종도 강직한 소신으로 번번이 조정에서 욕보이는 신하 위징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나 현명한 황후의 일침에 그는 둘도 없는 충신임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그러다 소신을 굽히지 않던 위징이 죽자 몹시도 비통해 하며 "사람은 구리로 거울삼아 의관을 바로 잡고, 옛날을 거울삼아 흥망을 보며, 사람을 거울삼아 득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위징이 죽었으니 짐이 거울 세 개 중 하나를 잃었도다"라고 했다.

 당 태종은 신하의 올곧은 외침이 귀에 거슬려도 기쁘게 들었다. 화를 참고 포용했다. 이유인즉슨 언로가 통해야 세상이 열리고 입과 귀를 막으면 알아서 기는 간신배와 모리배가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군주의 용인술 차이에서 국격이 갈리고 역사의 흥쇠가 나뉜다.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많은 군주들이 간신들의 아첨과 계략에 빠져서 사람을 잃었다. 그리고 망했다. 오늘날에는 계략에 빠진 것 같지 않음에도 사람을 잃고 있다. 정의에 살고 명분에 움직이는 소신 있는 사람이 그만큼 줄어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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