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여름내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자연의질서 속에서는 차마 고개를 숙여야만 했는가! 요즘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결이 제법 산산해졌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붙여진 이름 따라 하늘은 높아지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곡식들이 알지게 익어가니 그저 좋다.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녘을 바라다보면 비록 내가 지은 농사가 아닐지라도 흐뭇하다. 허나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풍년이 들면 온 동네가 떠들썩하니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요즘은 쌀농사가 풍년이 들어도 걱정이 앞선다. 쌀 가격이 제 값을 내지 못하니 풍년임에도 농민들은 울상이다. 근본적으로 쌀 소비가 되지 않으니 어떤 대책도 여의치가 못하다.

 반면 너무 뜨거웠던 날씨 덕에 배추가격은 폭등이다. 한쪽은 울고 다른 한쪽은 웃는다. 삶이란 것이 참으로 묘하다. 도심에선 하늘이 낮은 듯 아파트가 치솟고, 도로를 나서면 차들이 길에 널리고, 거리엔 먹을거리, 볼거리들이 넘쳐나고, 사람들로 북적댄다. 문명이 발달되니 외형의 삶의 질은 높아졌다. 하지만 명목뿐이다. 경제적인 면은 나아졌지만 삶의 진정한 여유가 없다.

 물질에 목적을 두다보니 시간에 쫓기고, 급하게 살다보니 마음이 불안해져 간다. 가까운 이들과 정을 나누며 오손도손 살 여유조차 없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시간의 노예,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자연의 질서처럼 때가되면 모든 것은 지나가고 이루어지니, 가던 길 멈추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조금 느리게, 천천히, 바람 좋은 가을빛을 따라 내안의 나를 찾아 이 가을 속으로 떠나 봄은 어떨지.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