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김영애 수필가]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처럼 그렇게 가을이 왔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에 하룻밤 사이에 다가온 가을은 차마 낯설기까지 하였다. 전쟁같이 치열했던 사랑이 끝났을 때 오는 허탈감마냥 허무하기까지 했다. 이별이 준비되지 않은 사랑의 그 뒷모습처럼 언제 우리가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었냐는 듯이 서늘하게 가을이 왔다. 잠 못 이루던 지난여름의 기억을 이젠 잊어야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훌훌 털고 가을을 맞이해야한다.

 또 다른 사랑을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이 비워질 대로 비워져있어서 겸손해지듯이, 이 가을은 왠지 나도 겸손해지고 싶다. 폭염과 열대야로 무기력해져서 생업마저도 태엽이 풀려버린 시계처럼 느슨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물 빠진 어항에 금붕어 같이 간신히 숨만 쉬고 여름을 살았다. 그렇게도 뜨겁게 달구어대고 잿물에 푹푹 삶아대듯 힘들게 했던 지난여름의 기억이 간사한 가을바람에 차츰 소실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준비 없이 맞이한 가을 앞에서 나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본다. 불가마 같았던 더위로 잠 못 이루던 여름의 흔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지축을 흔드는 대지진이 으르렁대면서 이 땅을 뒤흔들어 대고 있다. 추석 보름달을 보면서 처음으로 나만의 안녕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이들의 안녕을 소원해보았다. 경상도 어딘가가 진원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전체가 흔들렸으니 우린 얼마나 좁은 땅덩어리에서 살고 있음도 실감하게 되었다.

 작은 지축의 흔들림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는 좁은 땅덩어리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핵을 무기로 위협을 하고, 그 반쪽 땅마저도 동과 서로 반목하며 네 편, 내 편을 만든다. 그리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만약에 인류의 재앙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얼마나 비웃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사람도 화가 나면 불호령을 하듯이 분명 이 땅의 저 진노함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겸허해지는 마음이 든다.

 문득 건강하게 살아 숨 쉬는 이 평범한 일상이 감사하고 행복해진다.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짧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미워도 미워하지 말자, 더 많이 사랑하자, 사소한 일로 전쟁같이 싸우지 말고 살아야지 하며 나를 다스려보는 시간이다. 눈뜨면 마주치는 인연들에 감사하고 살자.

 어머니가 여름 내내 수고하신 들길을 가을바람에 이끌려서 걸어본다. 들풀 마르는 냄새가 아메리카노 향에 익숙해있던 나를 순연하게 만들어준다. 가을바람이 스칠 때마다 낱알이 영글어가고 과육들이 단맛으로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가을의 결실은 지난여름을 잘 견디어준 인내의 결과물들이다.

 가을 들녘에 서면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처럼 경건해진다. 쩍쩍 갈라지던 논바닥같이 내 마음도 그랬었다. 그 여름의 혹독한 담금질로 나는 성숙했고 지금 잘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뜨거운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 내고 꼭지가 떨어질 만큼 모진 비바람에도 잘 견뎌낸 과실이 단맛으로 익어가듯이 그렇게 나의 가을을 찬미하겠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