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문자가 버젓이 그림 속에 들어앉아 있다. 화사하게 핀 꽃에 신문지가 슬그머니 합성되어 한 송이 꽃으로 어우러진다. 서로 다른 두 물성의 합일이 생화인 듯, 조화인 듯 경계를 넘어 모호한 미소를 보낸다. 20대의 젊음과 활짝 핀 꽃, 신문이 갖는 의미에 초점이 맞아 있다. '오늘'이 가장 가치 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깜찍한 발상이다.

 이들은 한국판화를 연구하며 창작활동을 하는 판화전공 박사들이다. 모두 35명이 생거판화미술관에서 거방지게 놀이마당을 펼치고 있다. 「기호경(記號鏡), 한글로 바라본 세계의 풍경 전」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한글과 판화, 기호경이란 그 말에 호기심이 일어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어찌 판을 벌였을까. 작품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나를 잊으셨나요?' 화폭 중간의 옥좌에 정좌하고 있는 세종대왕과 그 뒤로 날카로운 선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상처라는 부제가 붙었다. 오른쪽 귀퉁이에 평화의 소녀상이 다소곳하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어진 작품은 세종대왕의 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혼돈이다. 이윽고 어지러웠던 선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흔들리던 상도 선명해졌다. 이를 소통이라 이름 했다.

 한글 창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작가는 한글이야말로 소통임을 발견해 낸다. 무언의 소녀상도 세계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던져 마침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현재와 과거,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모습 또한 눈길을 끈다. 동서고금, 시공의 혼재를 통해 복잡 다변한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됨을 느낀다. 시계를 넘어서 옛 풍속도의 인물들을 총출동시킨 부분도 이색적인 재미와 깊은 인상을 준다.

 '데이지와 드레스' 석판화 작품 앞에서 발길이 머문다. 꽃과 전통한복 복색이 곱다. 작가는 의상을 통해 자아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심리적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때때로 그 사람이 입은 의복으로 직업이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일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로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 크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판화에 한글이 들어앉아 하나의 작품으로 융화내가는 의미를 읽는다. 젊은 작가들이 판화에 대한 새로운 기법과 표현에 대해 연구하고 시도를 꾀하는 작업이 신선하다. 예술의 창조 정신이 와 닿는다. 치열한 작가정신이 곧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개척해 가는 것이지 싶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세상, 모두가 추구하는 길 아닌가.

 이제 미술, 음악, 문학 등 예술의 분야도 어느 한 장르만을 고집하기보다 조금씩 경계를 허물며 융합하고 조화롭게 젖어 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숨은 기호를 찾아본다. 나만이 옳다 고집하던 길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일, 다른 분야에 동조하며 서로 융합해 가는 과정에 조금 눈 틔움을 하고 간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