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출근할 일터가 없어지니 일상의 생활 패턴이 달라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을 하려고 옷장을 열었다. 선뜻 손이 가는 옷이 잡히질 않는다. 외출복 위주의 정장 형태가 대부분이다. 신발 또한 단화보다 7㎝높이 구두를 선호해 왔다. 스커트 정장에 더 잘 어울리고 몸맵시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하이힐은 여성들만의 자존심이기도 하지 않는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걷는 걸음은 어느 정도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하기에, 발이 겪을 시련은 슬그머니 외면을 해 왔다. 내가 행보할 때마다 가장 먼저 길을 잡고 나서온 발은, 온전히 바닥을 편히 딛고 지낸 날이 드물다. 늘 충직한 하인처럼 어떤 신발이건 묵묵히 받아들여 준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를 위한 배려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신발, 그 존재의 이유는 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발의 사정보다는 한 치라도 더 높게 나를 곧추세우기 위해 옥죄는 생활을 강요해 온 셈이다. 발에 맞는 신을 고른 것이 아니라 먼저 세련돼 보이는  형태를 고르고 그 틀에 맞게 발을 길들여 왔던 거다. 평지를 딛게 되어 있는 운명을 반쯤은 바닥에 닿지도 못하게 꺾어 세우고 다니게 했다.

 기껏 한 뼘 남짓 크기로, 내 온 몸을 지탱해 주기에도 버거웠을 터인데 아랑곳 하지 않았다. 발은 나를 떠받들어 주기 위한 존재로 여기고 머슴처럼 부려 왔던 것이다. 그래도 저녁이면 꺾여 있던 몸을 펴며 본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오니 퍽 무던한 편이다.

 어느덧 60년 세월이다. 모처럼 편안해 보이는 신발을 한 켤레 샀다. 순전히 발을 위한 것이다. 운동화와 구두의 중간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능성 신발이라며 가격도 제법 높다. 어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생 군소리 없이 나를 모셔온 발이 편할 것이라 하지 않는가. 이제 쉬엄쉬엄 함께 가자 싶다. 고단한 하루를 뉘일 때면 꾹꾹 주물러 수고로움을 위로도 해주리라.

 높은 굽을 내리고 길을 나서본다. 마음까지 느긋해진다. 그동안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부분만을 신경 쓰느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탱해 준 것들에 대한 그 존재 가치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낮은 바닥에서 주인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온 몸으로 그 주인을 받들어 온 것이 발이다. 남의 눈에 띄지도 않고, 폼 나게 나설 형편도 못되었다. 힘들어도 대 놓고 땀 한번 흘리지도 못하고, 안으로 삭이며 굳은살로 견뎌내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뚝살이 된 뒤꿈치가 견대다 못해 쩍쩍 갈라지기까지 했을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낮게 엎드려 있는 발을 본다. 만년 조연인 삶이다. 그가 마음 편안하게 들어앉을 집하나 마련해 주며 노고를 위로한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신은 진정 그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그대가 신의 진짜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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