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모처럼 삽상한 바람이 안겨온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들이마신 바람이 달다. 그동안 장맛비에 무더위까지 얼마나 질척였던가. 여름이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양 서슬 푸르게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을 참 많이도 곤경에 빠뜨렸다. 자리 욕심 또한 대단하다. 때가 되기도 전에 봄의 자리를 빼앗더니 입추가 되어도 눈도 꿈쩍 않고 여름 행세를 계속하며 자리를 내주려 하질 않는다.

 사람이든 계절이든 제 있을 곳을 가려 앉고, 물러날 때 들어설 때를 가릴 줄 알아야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여기저기서 이상기후를 들먹이며 계절감이 없어지고 있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령 이대로 우리의 아름다운 사계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처서가 지나고부터는 밤이면 선들 하기까지 하다. 불과 하루 이틀 전만해도 소나기를 쏟아내며 기세가 부리던 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꼬리를 내린다. 처세에 강한 사람만이 그러는 줄 알았더니 자연 현상도 이리 딴청을 하는 것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럼 그렇지. 역시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음을 느낀다.

 바람결에서 가을 냄새가 스친다. 걷고 싶은 날이다. 한낮 따갑던 햇발이 주섬주섬 빛살을 거둘 무렵 집을 나섰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몇 포기씩 작물을 심어놓고 매일 들여다보는 남편만의 아지트로 향했다. 진천 시내를 가로질러 백곡천변에 이르니 제법 걸을 맛이 난다. 산산한 바람과의 동행이 기분을 썩 좋게 한다. 30여분 걷는 동안 자동차로 다닐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불어난 개울 물소리가 힘차다. 덩달아 내 발걸음도 경쾌하게 마음을 앞질러 간다. 벌써 벼 이삭 팬 논이 군데군데 보인다. 추석에 선을 보일 올벼인가 보다.

 이윽고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서너 두둑에 심은 참깨가 반 정도 베어져 있다. 장맛비에 썩고, 깨알이 쏟아져 거둘 것이 없다며 생병 앓는 소리를 한다. 직장 다닐 때부터 아침저녁 즐기던 일인데, 정년퇴직 후엔 온 정성을 들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평소보다 찬거리 몇을 더 장만하여 늦은 저녁상을 보았다. 따끈한 찌개를 떠 넣으며 한마디 한다. "며칠 사이로 바람결이 확 달라졌어" 마당 풀숲에서 울던 풀벌레들의 소리가 한층 깊고 높아졌다. 일부러 창문을 열고 귀를 기울여 본다. 아는 것이라고는 귀뚜라미 소리뿐이지만, 여러 종류의 소리가 정겹고도 반갑게 들려온다. 종족 번식을 위한 성스러운 외침이 아닌가. 본분을 다하기 위한 혼신의 울림이기에 각기 다른 소리를 내도 잘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는가 보다.

 고수가 장단을 맞추듯 툭툭 땡감 떨어지는 소리가 추임새를 넣는다. 마당에서 뻘쭘히 키를 높여온 감나무가 제 열매를 다스리고 있는가 보다. 곪고 온전히 못한 것들은 가차 없이 떨군다. 감나무인들 제 살붙이를 떨어내는 아픔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잘못된 부위를 눈감아 준들 온전히 익어 갈 수 없음을 아는 게다. 유익한 결실을 위해 자신에게는 냉정하고, 남들에게는 관대하게 베풀어가는 지혜를 가을바람은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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