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오랫동안 먼 길을 끌고 다니던 구두가 나를 버리려나보다. 아이들 학교로 백화점으로 놀이동산으로 일터로 하루도 쉼 없이 나와 동행을 했고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했던 낡은 가죽 구두가 이제는 기운 허리를 감당 못하겠는지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수선할 길이 없는지 살펴본다. 가죽은 낡을 대로 낡아 허옇게 트고 갈라져 속살을 드러내고 기울어진 선체마냥 뒷굽은 한쪽으로 닳아 없어졌다. 오랜 동안 편하다는 이유로 계절에 관계없이 끌고 다니며 혹사를 시켰나보다.

 다른 구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외출할 때면 이것저것 고르다가도 이 낡은 구두를 신게 된다. 한 몸이 된 것처럼 14년을 함께하더니 몸통이 휘어져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구두가 나를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신발장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새 구두는 펑퍼짐한 낡은 구두와 다르게 발을 작게 보이게 하는 것이 꼭 외씨 같다. 하지만 볼을 옥죄고 금세 피곤하게 만들어 멀리 걸을 수 없을 만큼 불편했다. 친구의 사무실에 들러 새 신발을 훌렁 벗어 던지고 화끈화끈 열이 나는 발부터 식힌다. 호들갑스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백목련처럼 희고 투명하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 깊은 주름과 군데군데 기미가 슬어있다. 부잣집 딸이란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여학생" 잡지를 정기구독 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그녀의 잡지를 빌려 보고 계란말이 반찬을 빼앗아 먹고, 필통 속에 빼곡한 좋은 학용품을 내 것처럼 꺼내 썼다. 그녀의 방에서 종일 수다를 떨고, 남학생이 몰래 놓고 간 수줍은 편지를 함께 읽으며 깔깔대기도 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프로에서 보낸 사연이 낭송되기를 가슴 조이며 바싹 귀대고 듣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된지 40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기쁜 일, 슬픈 일, 작은 비밀까지 공유하며 서로 어깨를 기대고 살아왔다. 오래 묵어 곰삭은 젓갈 같고 오랫동안 신고 다닌 낡은 구두 같은 친구이다. 지금은 벌어먹고 사느라 허리 펼 날이 없다.

 내가 낡은 구두의 밑창을 갈고 뒷굽을 갈고 찢어진 가죽을 꿰매고 수없이 수선을 해서 신었던 것처럼 아마 그녀도 수없이 마음 같지 않은 남편에 대한 생각을 수선 했을 것이다. 아무리 닦아도 광이 나지 않는 낡은 구두에 구두약을 바르고 닦고 문지르듯 그녀는 아직도 남편에 대한 생각을 닦고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오래 묵은 인연의 끈, 곰삭아 익숙해진 정, 털어버리지 못하는 연민,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홀쳐 맨 매듭처럼 옥죄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쉬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슴 저 밑에서부터 사랑보다 더 끈끈하고 뜨거운 정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와 낡은 구두를 꺼내 다시 한 번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래 한 번 더 수선해 보자. 허리 휜 촌스런 구두가 날 버리려다 다시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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