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황혜영 서원대 교수] 방학동안 프랑스를 찾았다. 파리에서 며칠 머문 뒤 남프랑스로 가기 전 우선 보르도로 이동했다. 보르도 생장 역에 도착하자마자 다음날 방문하기로 계획한 보르도 근처 중세마을 생떼밀리옹행 기차표를 미리 예매하고 안내소 직원에게 확인 차 문의를 하였더니 직원이 승차 홈 안내 화면에는 생떼밀리옹 대신 종점이름이 나온다고 안내해주었다. 나는 종점 이름 베르주라크Bergerac를 보는 순간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베르주라크가 여기구나 싶었다.

 다음날 생떼밀리옹 가는 기차에 오르며 옆 좌석 프랑스 아주머니에게 베르주라크 가는 기차 맞아요? 하고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자기가 베르주라크에 산다며 아주 오래된 예쁜 마을이라고 볼 곳으로 추천해주었다. 베르주라크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가보고 싶어 원래 예정에는 없었지만 생떼밀리옹을 보고 베르주라크에 갔다가 보르도로 돌아오기로 했다.

 생떼밀리옹 중세성곽도시를 보고 베르주라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베르주라크에 도착해서 옛 도시 쪽으로 걷다보니 베르주라크 노트르담 성당이 나왔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마침 파이프오르간 연주자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파이프를 통해 넓고 높은 천정의 성당 전체로 울리는 음이 웅장하고 장엄하여 천상에서 울리는 음악 같았다. 원래는 성당 안을 한 번 휙 둘러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매혹되어 안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나왔다.

 다시 조금 더 좁은 골목길을 통과해 조금 더 가니 아주 예스러운 마을에 아담한 광장이 나오는데 거기 동상이 하나 서 있다. 바로 커다란 코에 얼굴을 살짝 위로 향하고 있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상이다. 마침 그 동상이 있는 작은 광장 정면 현관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시길래 여기 베르주라크에 이 동상 말고 또 다른 볼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니까 경사진 길을 조금 더 내려가보라고 하신다. 조금 더 길을 내려가 보니 또 다른 작은 광장이 나오는데 작은 광장 둘레로 아름다운 오래된 건축양식 집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두 거리로 둘러싸인 작은 광장 가운데 시라노 상이 하나 더 서 있다. 먼저 본 동상보다 더 오래된 아주 심플한 흰 상인데 오직 큰 코가 두 동상 주인공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시라노 상의 시선은 그랑 물랭 가의 아담한 옛날 집 2층 창을 향해 있어 마치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2층 발코니로 록산느를 불러내어 어둠 속 나무 뒤에 몸을 가린 채 시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라노의 포즈 같다.

 시라노는 17세기 실존 인물 사비니앙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삶을 19세기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허구적으로 각색하여 만든 희곡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실제 시라노는 파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에드몽 로스탕의 문학적 상상이 낳은 인물을 통해 그의 출신을 표시하는 지명 베르주라크는 시라노의 정신적 본향으로 거듭나 새로운 전통을 써나가고 있다. 시라노의 성(姓)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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