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이른 새벽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많이 온화해졌다. 그동안 날씨가 혹한이어서 창문이며 문들마다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을 빈틈없이 차단하고 산다. 사람도 창문 밖 나무도 모두가 찬바람을 견뎌내고자 애를 쓴다. 휘몰아치는 세상의 바람을 제 서있는 자리에서 견뎌내고 있다. 이제는 날씨도 조금 풀린 듯싶다. 모처럼 새벽공기를 즐긴다. 혹한을 견뎌내서 그런지 웬만한 찬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올겨울은 예외 없었던 혹한이었다. 포근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싫고 출근하기도 싫었다. 얼굴을 에워싸는 찬바람과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너무 싫었다. 어떻든 혹독했던 추위를 겪어내니 이제 웬만한 추위는 대수롭지 않다. 오히려 온화한 느낌이다. 절기상으로도 입춘이 지났으니 봄의 시작이다. 구정도 며칠 남지 않았다. 농부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이제부터 농사준비를 해야 한다며 세워 두었던 트렉터며 각종 농기계, 논밭에 뿌려야 할 퇴비며 이런 저런 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도심 속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잘 느끼지를 못한다. 회벽에 둘러싸이고, 사무실에서는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생활하고, 출 퇴근길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고, 백화점에서는 사계절 과일이 언제나 멋진 모습으로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으니 계절의 변화에 대한 느낌에 무관심 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모든 문화, 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화되기에 그들을 좇아가기 바쁘다. 계절의 오감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릴 틈조차 없이 살아가기 바쁜 시대이다. 젊은이들은 발 빠르게 그 속도를 따라가지만 7080세대인 필자는 점점 더 뒤 떨어지고 있다. 좇아가기가 벅차다. 그래서 고집이라도 피우고 싶다. 그럴수록 더 느리게 가고 싶다고.

 어차피 가는 길인데 느리게 가면 누가 뭐랄까! 천천심 걸어가면서 산 아래 개울가, 얼음장 밑으로 졸졸 거리며 오고 있는 봄도 들여다보고, 가던 길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언 땅을 헤집고 올라오는 냉이의 어린 싹에게 사랑스런 눈 맞춤도 해주고, 애쓴다고 보듬어 주기도 하고, 혹독한 추위로 기세를 부렸던 겨울도 온화한 봄의 미소에 시나브로 사라져간다. 그 겨울의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뒷짐 지고 바라보다가 살랑 이며 찾아오는 봄바람에 넌지시 나를 얹어보기도 하련다.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우리는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뒤도 옆도 돌아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창문을 열었다. 어두운 밤길을 뚫고 달려오는 신 새벽에 외치는 우유배달 청년의 힘찬 발자국소리가 아파트 계단을 울린다.  '추운데 감사합니다. 수고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청년의 우렁찬 목소리에 봄이 가득 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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