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그녀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위로 꽃이 피었다. 복사꽃이다. 긴 생머리가 허리춤까지 내려와 몸짓 따라 찰랑댄다. 그녀의 봄은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긴 머리를 단장하는데 족히 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다시 거울 앞에 섰었다.

 어느새 긴 머리가 거추장스런 나이가 되었다. 단발머리보다 더 짧게 잘랐다. 아직도 머리숱이 별반 줄지 않아 속 머리를 층하지게 쳐내야 한다. 선머슴 같은 머리를 보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자신의 머리인양 쓰다듬는다. 그녀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감추느라 모자를 벗지 못한단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수도 있으니 예쁘게 꾸미고 살란다.

 어린 시절 여자아이들은 거의 비슷한 머리를 했었다. 앞머리는 눈썹위로 뒷머리는 귀 밑으로 해서 짧게 잘랐다. 나도 별수 없이 단발머리였다. 늘 뒷머리가 들떠 있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예 사내아이처럼 짧게 잘랐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길렀고 머리띠를 하면 파마한 것처럼 보였다. 동네 아주머니는 자신의 머리와 바꾸자고 하셨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곱슬머리가 더욱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주었다. 소꼽친구는 어머니가 머리를 땋아주던 모습이 부러웠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신경써줄 여유가 없었다면서 잊혀지지 않는단다. 젊은 시절 툇마루에 엉덩이 한번 제대로 붙혀 볼 새도 없이 바쁘셨던 구순의 어머니도 늦둥이 막내딸의 머리를 만져줄 때가 행복했었다고 하신다.

 나처럼 머리숱은 너무 많아도 불편하고 적어도 부담스럽다. 탈모가 심해 머리카락을 이식한 친구가 있었다. 호기심에 한번 만져 봐도 되느냐고 묻자 선뜻 머리를 내어주었다. 만지작거리다가 한 올 한 올 귀한 그것을 짓궂게 잡아당겨 보았다.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으나 억새 풀밭에 손을 베일 듯 한 거침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도 철없는 행동이었다. 조물주는 내게 지나치게 많은 머리카락을 주었다. 일부는 제 멋대로 뻗혀나가고 곱슬거리며 삼십대부터 새치가 나오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이마의 끝부분에서 몇 가닥씩 그랬고 가르마를 따라 점점 영역을 넓혀간다. 가끔 그 부분만 염색을 한다. 성품이 별나선지 아직도 두 몫의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러면 청춘을 다 보낸 내 머리는 다시금 청춘을 맞이한다. 신은 불공평한 것 같지만 지극히 공평하다. 지인이 내 머리의 새치를 두고 한말이다. 주어진 무엇인가가 많다고 해서 자만할 필요는 없다. 다른 것으로라도 공평하게 만드시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가 반박한다면 신이 아닐지라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한 떨기 복사꽃을 닮은 그녀의 봄도 누구나의 인생처럼 여름을 향해 가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어느 순간 앞만 보고 걷던 길에 멈추어 뒤돌아보면 내게도 찬란한 봄이 있었구나. 깊은 상념에 잠기리라. 그러나 그 순간 아직도 청춘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리라. 난 언제나 찬란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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