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주름이 굵어지고 괜한 소리가 늘고 / 포개진 약 봉지에 세월을 맡긴다. /웃음이 줄고 몇 달 건너 하나 둘, '삭제' 키를 누른다. / 떠난 이름들로 가벼워지는 전화기 / 이젠 끝물이다 / 머잖아 내가 지워질 차례다. /

 필자의 시 '지우개' 전문이다. 절친(絶親)을 잃는 것처럼 허전한 건 없다. 참으로 부끄럽다. 1년의 투병 생활 동안 근교 한번 번듯하게 나들이 못한 채, 필자의 50년 지기를 먼저 보냈다. 친구에 의해 맑아지고 때로는 동심되어 제자리를 찾은 일 얼마나 많았던가? 곰곰 생각해봐도 멀쩡한 정신 아닌 채로 살아온 게 분명하다. 백세시대 아직 칠순의 문턱도 오르기도 전, 우린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져 전화번호마저 지워야 하나보다.

 누구나 세월과 함께 늙어간다. 나이는 거저 주지 않는다. 젊었을 땐 몰랐던 세상 밖 시선이 내면화된 인생 훈장 맞다. 그런데 어떤 분야에 오래 몸담아 나이와 공을 쌓은 원로를 찾을 수 없으니 위·아래조차 뒤죽박죽 인성 붕괴의 굉음만 요란하다. 그나마 잘못 끼었다간 머쓱하거나 쪽팔리기 십상이다. 나이 먹는 학습과 준비 부족이었다. 변화에 긴장할 겨를도 없는 과정을 건너 뛴 무늬만 그럴싸한 늙음(老化)이야 어쩌겠는가. 정신적 노쇠(老衰)로 먼저 늙은이 되는 게 문제다.

 삶의 무게가 둔중했던 어른 중에도 대화가 밀린다 싶으면 다짜고짜 '젊은 게 가정교육을 받기나 한 거냐?'라며 오히려 조목조목 따지려 든다. 겁 없는 늙음이다. 자신은 수용하길 거부하면서 좌충우돌 조소(嘲笑)거리를 만들어 낸다. 노벨문학상 후보대열에 오르내린 여든 중반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 음풍농월(吟風弄月)의문을 던진다. 그가 쓴 시(詩) 몇 행이 떠오른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방기를 드러낸 노추(老醜) 고백처럼 심란하다. 기성세대 권위가 과부하에 걸린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몽유다. 끝물인줄도 모른 채  '노미(老美)'의 간절함을 잊고 있다.

 자식 뒷바라지에 눈코 뜰 새 없던 부모가 거슬리는 존재로 퇴행하니 "제 놈들 어떻게 키웠는데?" 언어 너머로 다른 시름이 깊다. "그러시는 게 아니죠. 부모 잊고 사는 자식들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우린 너무 잘하는 겁니다." 뜨끔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서글프지만 현실을 어쩌랴. 100세 할머니 할아버지도 노인다울 때 비로소 어르신으로 대접 받는다. 분노의 감정에 얽매여 세대 간 권위를 흔들고 무너뜨린 자업자득 아닐까.

 어쨌든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아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했다. 아무리 의욕 넘쳐도 부지런히 갈고 닦은 후배를 능가할 수 없다. 물러설 줄, 내려놓을 줄 아는 '노탐(老貪)'으로 부터 해방, 나이 듦의 과제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의 길을 잘 찾아야 삶이 자유롭다. 제발 가르치려고 잔소리 늘리지 말라. 말꼬리 잡고 경우 따질수록 부담스러워 한다. 보여줄 때 덕망도 따른다. '평범한 어른'의 길, 졸렬함을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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