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근 변호사

 

[오원근 변호사] 얼마 전 태국과 말레이시아 접경 지역에서 간신히 숨이 붙은 채 발견되었다가 숨진 돌고래 뱃속에서 80개가 넘는 비닐봉지가 나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8kg이 넘는 비닐봉지들은 고래의 뱃속에서 조금도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래의 다른 생리적 기능을 막고, 결국 사망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편리 추구가 어떻게 생태계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극히 일부의 사례라 할 것이다.

 비닐봉지는 그래도 눈에 보인다. 육지에서 쏟아져 내려온 미세플라스틱은 눈에 보이지 않아 더 위험하다. 바다 생물들이 이 미세플라스틱을 먹고, 그 생물들을 인간이 먹으면 미세플라스틱이 인간의 몸속에도 쌓인다. 이렇게 우리들 눈에 아직 확인되지 않은 오염 사례들이 얼마나 많을지, 가만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플라스틱(plastic)은 '형성력(창조력)이 있는'의 뜻을 갖고 있다. 원하는 대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플라스틱의 가치는 나무나 철 같은 다른 소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오죽하면 성형수술의 영문표기도 '플라스틱 서저리(plastic surgery)'다. 어떤 형태든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플라스틱은 변화의 최정점에 선 것 같지만, 썩거나 분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고정불변의 대명사다. 자연의 최고 이치는 변화인데, 플라스틱은 이를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공동묘지에 가면 플라스틱 조화들이 무덤마다 빠짐없이 붙어 있다. 한번 꽂아놓으면 다음 명절까지는 버티어주니, 손쉬운 생각에 거의 예외 없이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명절 때 가보면, 공동묘지 한 쪽에 거두어들인 빛바랜 조화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것들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무덤 속에 계신 분은 흙과 더불어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그를 추모한다는 꽃은 왜 썩지 않고 자연을 거스르는가. 그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진정한 추모인가. 이런 뜻에서 우린 장모님 무덤에 처음부터 조화를 꽂을 화병을 설치하지 않았다.

 우리법인 산악회는 한 달에 한 번 산에 간다. 이번 달에 80번째 산행을 했다. 첫 번째 산행 점심 자리에는 종이컵과 나무젓가락 등 일회용품이 많았다. 내 사비를 들여 등산컵과 수저집을 사 돌렸다. 그 후로 산에서는 일회용품이 거의 사라졌다. 사무실에서도 가능하면 일회용품을 쓰지 말자고 하였다. 난 나의 이런 시도가 일회용품에 대한 직원들의 생각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8년여가 지난 지금, 상당수 직원들이 여전히 커피 한 잔, 물 한 모금 먹을 때도 종이컵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쓴다.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서 뼈저린 아픔을 경험해봐야 변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 같다. 우리 민주주의도 지금 정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는가. 일상의 민주주의, 일상의 생태주의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것인데.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