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크, 크욱”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갔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교외에 위치한 단바르쟈에서 키미꼬는 아버지와 다시 만났다. “아빠!!” 비명인지 절규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새파란 하늘에 메아리쳤다.

1945년, 당시 베이징 시내에는 40만 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해 4월 16살 된 키미꼬는 일본인 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나고 자란 도쿄를 떠나 베이징에 이사 온지가 5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1년도 채 안 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키미꼬의 아버지는 우정성(郵政省)의 고급관료였다. 덕분에 돈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지만 거처를 중국으로 옮기면서 급변한 환경 때문에 적응하는 데 온 가족이 애를 먹었다. 키미꼬는 집안의 맏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려 깊고 효심이 지극하던 그녀를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무겁고 어두운 내용뿐이었다. 개전 이후 금방이라도 태평양 전체를 집어삼킬 듯 승승장구하던 황군(皇軍)이 사이판, 괌 등지에서 고전하고 있다더니 얼마 전에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와 같은 본토의 주요도시들이 미군의 폭격을 받고 큰 피해가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십만 명이 죽었다”, “오키나와에도 미국이 상륙했다더라”.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낮은 목소리로 출처 불명의 “극비정보”를 소곤거렸다.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매일 같이 발표되는 “황군 대승리”라는 공식발표를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5월 9일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키미꼬를 서재로 불렀다. “딸아 내가 이런 걸 받았네”. 아버지의 손에는 한 장의 빨간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징집영장이었다. 전황이 악화되고 본토에서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이 마흔을 훨씬 넘긴 아버지를 전쟁터에 불러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키미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엄마와 동생들을 부탁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아버지는 만주(滿洲)로 끌려갔다. 8월 9일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군이 남하하자 만주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소련은 잡아온 일본인 포로의 관리감독을 몽골정부에 맡겼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중심으로 29 개의 일본인 포로수용시설이 있었다. 여름에는 40도,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기후, 턱없이 부족한 식량배급, 그리고 가혹한 강제노동에 많은 일본인들이 죽어갔다. 2년에 걸친 수용기간 동안 포로 12,318명 중 1,618명이 죽었으며 사망률은 13%에 달했다.

2001년 8월 키미꼬는 성묘단의 일원으로 몽골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유골을 끌어안고 그녀는 한없이 울었다. 함께 묻혀있던 펜던트를 열어보니 거기엔 16살 소녀였던 자신의 사진이 있었다. 그날 베이징 집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지 만 56년만의 재회였다. 이상은 모두 실화이다. 키미꼬(喜美子)는 나의 고모이고, “아버지”는 내 조부 도쿠나가 도시테루(德永 壽璋)이다. 지금 몽골에는 16 군데의 일본군 포로 묘지가 있다. 우매하고 광기어린 정부를 믿고 따르다 팽개쳐진 그들의 혼백을 누가 달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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