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달빛 고요한 밤에

풋보리 냄새를 진득하게 품고 있는 들판에서 부는 바람은 따뜻했다.

햇볕도 좋았다. 둥구나무 밑에서 바라보이는 들판에는 은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햇살이 반짝거리다 바람이 불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환해서 둥구나무 밑의 그늘은 검은색을 칠해 놓은 것처럼 그늘이 짙었다. 그늘 안에는 웬만한 집 사랑방 크기의 너럭바위가 있었다.

보리논에는 보리가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모를 내기 위해 물을 받아 놓은 논에서는 실바람에서도 물 주름이 일어났다. 아직 물을 받지 않은 논에서는 쟁기질을 하고 있는 남정네들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통나무 같은 하체를 묻고 있었다.

둥구나무의 그늘이 끝나는 지점은 울타리가 없는 박평래집의 마당이다.

박평래는 조개껍질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사랑채 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얼굴로 면장댁 골목을 바라본다. 다른 골목은 부피가 큰 갈비 한 짐을 지게에 지고는 게걸음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만큼 좁고 협소하다. 면장댁으로 가는 길은 달구지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넓게 뻗은 골목 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솟을대문이다.

솟을 대문 뒤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올라간 비봉산은 푸른 하늘에 봉우리를 묻고 있다. 박평래는 솟을 대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힘없이 돌리고 곰방대를 쥔 손으로 뒷짐을 진다. 너럭바위 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솟을 대문 앞으로 면장댁의 부엌데기 점순이가 촐랑촐랑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박평래는 들판을 흘끗 바라보고 나서 점순이가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요즘 들어서 면장댁 출입이 뜸했다. 닷새 전에 달구지에 나락 여섯 가마니를 실고 양산 정미소에 가서 빻아 온 이후로는 그 흔한 권련 심부름 가는 일도 없었다. 이병호가 권련 심부름을 시킬 때는 으레 풍년초 두서너 봉은 심부름 값으로 줬는데 그마저 떨어졌다. 며느리 상규네한테 풍년초 값을 달라고 손을 벌리기도 민망해서 엽초를 문질러 피우고 있는 실정이다.

"면장 어르신이 할아부지 올라 오래유."

점순이는 박평래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박평래의 몸을 빙 돌아서 온 길로 다시 올라가며 종달새처럼 내뱉었다.

"너는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고, 입에서 군내가 나도록 그릏게 갈쳐도 워찌 그릏게 소견이 읎냐? 내가 니 동상이냐? 아니믄 니 친구여? 할아부지한티 올라 오래유가 뭐냐, 올라 오래오가? 올라오시라고 해야지."

박평래는 점순이가 버르장머리 없이 말을 해도 기분은 좋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제 막 정지로 들어간 며느리는 보리쌀로 콩나물죽을 끓이는 것 같았다. 면장댁에 가면 적어도 쌀알이 섞인 밥을 고봉으로 먹을 수 있다. 너럭바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군침을 흘리며 잰걸음으로 점순이 뒤를 따라갔다.

"알았슈."

점순이는 고개만 뒤로 돌려서 박평래를 향해 입술을 삐죽거려 보이고 나서 깨금춤을 추듯 폴짝풀짝 걸었다.

"말만한 지지바가 조신하게 걸어가지 않구선……"

폴짝폴짝 뛰어가는 점순이의 엉덩이가 제법 탱탱하다. 박평래는 저것이 벌써 열서너 살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해죽해죽 웃으며 걸었다.

비봉산을 가리고 버티고 서 있는 솟을 대문은 너무 높아 보여서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은 박평래는 아이처럼 작아 보였다.

점순이가 행! 하고 웃으며 솟을대문 앞에서 옆으로 몸을 틀었다. 박평래는 굳게 닫혀 있는 솟을대문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잡고 허리를 넙죽 숙여 절을 하고 점순이를 따라 종종걸음을 쳤다. <계속>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