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소유와 누림, 얼핏 보면 똑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소유와 누림이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유하지 않는 것을 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때로 그것은 심각한 범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소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각 가정에서 자녀들은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들은 부모의 품에서 부모가 가진 것을 누릴 뿐이다. 어린 자녀들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든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일반적인 주종의 관계 그 이상임을 나타낸다. 자녀들은 부모의 형상을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지니게 마련이다.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거처로 에덴동산을 만든다. 이곳에서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단 하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빼고 말이다. 사실 이 열매 없이도 에덴동산에 있던 최초의 인간들은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데 불편함이 없는 삶만으로는 부족했다. 인간은 충족을 넘어 자기만족을 얻기를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한다. 뱀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기 위해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곧 어린 아이들이 어른을 부러워하듯이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어른처럼 자신의 것을 스스로 소유하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불편함 없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스스로 소유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누림’보다는 ‘소유’를 선택한 것이다. 소유를 선택한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뱀의 말처럼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진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소유의 문제는 오히려 인간 사회에 치열한 경쟁문화와 극심한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가져왔다.

과거 부모의 품에서 편안하게 살던 자녀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는데, 막상 어른이 되자 가진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책임질 것도 더 많아져 삶은 오히려 고단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소유의 문제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을 향해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사랑은 소유에 대한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은 소유를 통해 누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진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한다. 그것이 물질이든 아니든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것을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이 소유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희생과 헌신이 오히려 우리에게 진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랑은 타인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숭고한 희생인 동시에 내 자산에게는 진정한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는 아주 중요한 기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소유가 아닌 사랑을 통한 자발적인 헌신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인생을 소유에 집중하면 내 자신만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사랑을 하며 살게 되면 사랑을 받게 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내 자신 역시 최고의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놀라운 비법을 통해 소유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삶의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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