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근 변호사

[오원근 변호사] 이번 여름휴가는 고2인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이 시골에 가 있으면서, 내가 밭에서 일할 때 녀석은 책을 읽거나 빈둥거렸다. 녀석의 영어 문법 실력이 약해, 아주 얇은 문법책을 사 같이 공부했다. 청주에 나왔을 때는 시립미술관에 가 미술품을 관람했다. 청주지역의 젊은 작가들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작품들을 두고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러 산남동에 있는 한 칼국수 집에 갔다. 벽에 걸어 놓은 액자 속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道法自性". 앞에 세 글자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데, 마지막 "性"은 흘림이 심해 그것이 정말로 "性"인지는 자신이 없다. 아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道"와 "法"은 깨달음, 진리이고, "自性"은 스스로의 성품이니, 깨달음과 진리가 내 성품 안에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 밖에서만 진리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실은 나도 아직 다 이해를 못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 안의 성품이 바깥 세계와 만나면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해가는 지를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인생 공부라는 믿음은 확고하게 갖고 있다.

녀석과 같이 하고 있는 영어공부를 예를 들었다. 아무리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책을 읽더라도, 그 내용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내 것이 될 수 없다. 의문을 갖고 꾸준히 궁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내 것이 된다. 그렇게 나와 바깥세계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 아니 '하나(둘이 아님)'임을 확인하는 것이 '도법자성' 아니겠냐고 하였다.

우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민주주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아주 오랜 기간 민주주의를 배웠음에도 현실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 우리 현대사였다. 왜일까? 민주주의가 우리 안으로 전혀 내면화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도 실제 학교 현실은 획일화를 강요하였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원래 민주주의란 이상에 불과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체념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런 잘못된 현실이 우리 삶을 왜곡하면서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사법부는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다. 국민들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은 대통령의 처분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지 않은 법관들에게 위법하다고 판단하여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그 법관들이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드러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의 각종 사법농단 사례들은 위와 같은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헌법은 법조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과목이고, 헌법의 핵심 가치는 민주주의다. 그럼에도 사법농단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법관들에게 내면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민주주의를 내면화하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먼 이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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