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이십 몇 년 전 신혼 때 이야기다. 맞벌이하느라 매일 늦게 귀가하는 아내가 안쓰러워서 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선택한 음식은 냉면, 일본에서 이름난 소바의 고장 나가노 출신인 내겐 같은 메밀로 만드는 냉면이 아주 손쉬운 상대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뭐야?!” 완전히 불어서 젤리처럼 굳어버린 냉면을 보고 아내는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풀이 죽은 내가 불쌍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여보, 잠깐 기다려! 내가 다시 삶아줄게. 이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이직 한국어가 서툴렀던 나는 냉면이 어째서 떡이 되는지, 게다가 평소 동방예의지국을 강조하던 아내가 왜 누워서 떡을 먹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내 체면을 살려주고 순식간에 맛나게 냉면을 삶아낸 이 여자랑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워서 떡 먹기”가 ‘쉽다’, ‘간단하다’는 뜻을 가진 한국 속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냥 말하면 딱딱하고 멋쩍은 이야기도 속담을 써서 표현하면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잘 와 닿을 때가 많다. 사전에서 속담의 의미를 찾아보면 “예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지식, 교훈, 풍자, 흥취(興趣)를 담은 짤막한 말”이라 설명돼 있다. 속담은 민족의 마음과 지혜를 담아 대대로 계승돼 온 무형의 문화유산인 셈이다.

속담을 일본말로 “고토와자(諺)”라고 한다. 거리적으로 가깝고 종교, 문화, 정치, 경제 등 예부터 많은 교류가 있어왔던 한일 양국에는 서로 비슷한 속담들이 눈에 띈다.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라”,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급하면 돌아가라”와 같은 속담은 두 나라에서 거의 동일한 표현이 전해지고 있다.

한국에는 “남남북녀(南男北女)”, 일본에는 “동남경녀(東男京女)”라는 속담이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한반도와 동서로 늘어진 일본열도, 멋진 남자, 예쁜 여자가 어느 지방에서 많이 나오는가를 놓고 두 나라의 지형적 특색이 반영돼 있어서 흥미롭다. “호랑이 담배 먹을 적 이야기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호랑이가 살지 않는 일본에서 온 나로선 한국 속담에 호랑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신기했다. 한편 일본에는 “고양이 이마처럼 비좁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 바쁘다”처럼 고양이와 관련된 속담이 유난히 많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동물을 가깝게 느끼는지 한일 간에 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 “효도하고 싶을 때 부모 없다”라는 일본 속담이 그렇게 실감이 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을에 돌아가셨는데 임종에도 가지 못한 나는 부모님 대한 그립고 감사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아갈 것이다. “옷깃이 스치는 것도 전생(前生)의 인연”이라고 했다. 올해로 내 한국생활이 만 30년, 전생에 얼마나 많은 인연이 있었길래 이리도 길고 진한 삶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 걸까. 지금의 이 삶이 새로운 인연이 돼서 어떤 후생(後生)으로 이어질 것인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가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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