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우리는 항상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우리는 이 두 개념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 둘 중 하나의 개념이라도 사라지게 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개념 중에 어디에 더욱 무게를 두고 살고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시간보다는 공간에 더 큰 중심을 두고 있을 것이다.

어떤 대학에 들어갈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업할 것인지?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어디에 정착하여 살 것인지와 같은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고민들은 시간보다는 공간의 개념과 더욱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럼 시간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간은 우리가 목표한 공간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좋은 대학에 가기위해 혹은 목표한 직장을 얻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소비한다. 우리 삶의 가장 큰 보람은 남들보다 더 적은 시간을 사용하여 더 큰 공간의 개념을 얻게 되었을 때 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삶을 공간의 개념이 아닌 시간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이스라엘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나라를 이루고 또 그 나라를 잃게 되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유대민족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를 시간과 사건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여로보함 2세 치세 하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유래가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지만 성경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암 5:11-13)

여로보암 2세의 시대는 풍요의 시대가 아니라 학대와 거짓의 시대였다. 공간의 개념으로 보면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풍요의 시대가 맞지만 시간의 개념으로 보면 이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과 탐욕에 눈이 먼 죄악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도 공간보다는 시간의 개념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간은 말 그대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념이지만, 시간은 어느 누구도 소유하거나 조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시간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여전히 시간이 아닌 공간을 바라본다. 이러한 개념적 인식으로는 우리 인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공간은 마치 오늘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 아무리 넓고 좋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 내가 소유한 공간이 영원히 보존 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장 명확한 것은 공간의 존재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흐름을 유지한다. 이 변함없는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공간에 묶여 있는 우리의 삶의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길이 될 것이다.

더 많은 공간을 얻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인생의 방법을 넘어서 공간과 시간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서 공간의 개념이 줄 수 없는 인생이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은 금보다 귀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이제는 이와 같은 속담을 말하는 것을 넘어 진짜 시간을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사는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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