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강물 칠하려고 찍은 물감에 / 파랗게 깊어 가는 / 하늘 한 쪽 / 알밤 그려 볼까 고쳐 쥔 붓은 / 단풍잎 여기저기 흩뿌리는 심술/ 필자의 동시 '가을 익히기' 전문이다. 추석은 추썩추썩 다가온다더니 맞다. 백년 처음 뜨거웠던 낮과 밤, 과수·채소·특작·가축·수산 등 참혹하게 피해를 입었다. 산과 들 바다 모두 시름 깊다. 오죽하면 '버티기 힘든 재앙'이라며 두려웠을까. 그러나 어느 새 계절 변화를 느낀다. 풍작은 아니지만 장바닥을 메운 햇것에 저절로 고마움이 차오른다.

가을바람 한 점 부서질라 바지랑대 위 고추잠자리 유영마저 조심스럽다. 훌쩍 자란 추석 달로 믿는 구석도 생겼다. 어느 집안이든 유난히 속을 썩이거나 찌들게 사는 자식이 있다. 부모의 아픈 손가락이다. 장남은 맏이라서 막내는 또 끄트머리여서 안쓰러워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밤 잠 설칠 명절 분위기를 올 한가위엔 안심해도 될 런지.

추석 전, 팔남매는 보름달처럼 둘러 앉아 송편을 빚었다. 크기와 모양이 멋대로 여서 솔잎을 깔아 쪄내면 더 배꼽을 쥐게 했다. 다섯 째 아들의 읍내중학교 입학시험 합격 방이 붙던 날, 번호를 나보다 먼저 찾아내시곤 당신 등에 업은 채 세상을 다 얻으신 양 빙글빙글 맴도셨다. 3년 후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는 반대로 아버지를 처음 업어 보았다. 아버진 생각보다 너무 가벼우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부터 몹쓸 병에 100세 시대 예약의 부도란 걸 이제야 아련하다.

누구나 두 번 부모와 이별을 한다지만 내 나이 열여덟 충격치곤 너무 아렸다. 혼자되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대박은 없다"며 특(special)보다 룰(rule)에 삶을 치중하셨다. 침묵을 사랑하고 평생 자식의 무대를 꼼꼼히 준비하신 너른 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이 멎은 한참 후에야 눈을 감으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 하늘 먼저 낮아지니 머리를 떠났던 생각들 자리로 옮겨 앉고 한가위 보름달 쯤 고운 멍으로 그 어떤 교학상장보다 살아있는 강 되어 흐른다.

이번 추석은 꽤 연휴답다. 한가위 들판과 '민족 대이동·귀성 전쟁·꽉 막힌 도로' 역시 모두를 들뜨게 만든다. 가장 좋은 선물은 무얼까? 형제간 우애다. 그러나 벌써부터 '빚진 자식만 내 새끼'란 도덕적 딜레마에 부딪히면서 지나치게 기울어진 명절 부작용을 우려할 황당 궤변까지 들린다. 자식은 생각만으로 배부른 최고 지존(至尊)이다. 걱정 쯤 언제 그랬느냐 싶게 신효한 묘약과 같다. 엄살을 마냥 기다려줄 부모는 없다. 살아생전 일배주(一杯酒)라 했다.

경기 불황 탓에 가계부 걱정, '과도한 지출'은 아무도 원치 않는다. 남의 일은 체면치레에 앞장서면서 정작 지켜야할 때를 구분 못하는 이런저런 핑계도 나쁜 습관 중 하나다. 명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날이 아니다. 이혼의 불씨를 지피는 날은 더더욱 아니다. 불쑥 나타나 일단 전투적으로 엇나갈 셈인가. 그게 싫어 아예 발길 끊고 무관심할 건가. 문제는 균형 감각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호흡만 참으면 고향은 푸근하다. 마음먹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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