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회 청주시 오근장동장

[김복회 청주시 오근장동장] 직원이 많다보니 주말에도 부고장이 날아온다. 전달된 내용을 보니 친했던 직원의 모친상이다. 첫 근무지에서 10년을 함께한 직원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상복을 입은 그녀가 보인다. 명퇴를 하고난 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낯익은 영정사진 속에선 고인의 편안한 표정이 보인다. 상주와는 딸 부잣집이라는 공통의 가족구성으로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녀 형제는 딸이 여덟이고 필자는 여섯이다. 막내로 남동생이 있는 것도 똑같다. 그때 막내 남동생이 초등학교를 다녔었는데 그가 맏이 상주가 되어 양 옆에 장성한 아들과 함께 서 있다.

조문을 하고 나오면서 며칠 전 읽었던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의 칼럼이 생각났다. '나의 판타스틱 장례식'이라는 흔치 않은 제목이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죽고 나서 장례 지내면 뭐하나, 살아있을 때 해야지"라는 다소 엉뚱하다 싶은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리를 맴돈다.
  스스로 주재한 생전장례식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캐나다에서 평생 의사로 살아온 이재락 박사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교민 신문에 알려 300여명의 조문객을 받고, 조문객들은 검은 양복대신 평상복에, 여성들은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고 참석해달라고 했다.식은 주인공의 인사와 가족소개, 헌시낭송, 지인들의 회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암전문의인 큰아들은'마이 웨이(my Way)'를 아버지 앞에 바쳤다고 했다. 필자는 글을 읽으며 그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재락 박사는 "망자는 빈소에서 잠깐 예를 받은 뒤 찬밥신세다. 그건 억울하지 않은가. 찬밥이 아니라 그들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을 때 따스한 밥을 나누며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례 풍경은 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우리는 유족을 보고 문상을 간다. 눈은 영정을 보지만 산 자를 보고 절을 하고 봉투를 내민다. 상주의 지위, 나와의 이해관계, 친소 정도에 따라 봉투의 두께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의 장례문화는 살아 있는 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존재감을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사회가 신분사회임을 민낯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장례식장이다.  망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성대한 장례식이라도 자신을 애도하고 기리는 조사는 들을 수 없다.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정말 특별한 사람이 찾아와도 관속에서 일어날 수 없다. 이승을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도 정들었던 이들과 제대로 작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살아서 사랑하는 이의 배웅을 받으면 마지막 가는 발걸음도 가벼울 것이다. 하여, 생전 장례식은 내가 진정한 상주가 되는 것이리라.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떠나야 할 길 아니겠는가. 하지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라고 했다. 한기봉 위원이 말했듯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주인공이 이런 멋진 시 한수 읊조리는 생전 장례식이라면 그는 멋지게 살아왔고 멋지게 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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