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 충북수필문학회 회장·수필가

[김진웅 충북수필문학회 회장·수필가] 가을 햇살의 속삭임에 산책길로 나섰다. 나무와 풀과 공기는 점점 가을빛을 더해 가고 있다. 명암천 개울가에는 폭우에 휩쓸린 억새가 아직도 숨 줌인 채 쏠려있지만 지난해처럼 범람하지 않아 다행이다. 추석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침에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데 오후의 햇살에 따끈따끈하다. 벼를 비롯해 오곡백과가 추석 전에 여물려고 달음질한다. 우암산의 도토리가 익어가고 아람이 떨어지며 색동옷으로 갈아입을 차비를 한다.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해본다. 판문점의 봄이 평양의 가을로, 이제는 정말 획기적이고 알찬 결실을 맺고…….

초목이 바람의 일필휘지에 흔들리고 서둘러 가을 그림을 그려간다. 산책 나온 이들이 한여름에는 엄두도 못 내던 저수지 둑의 의자를 차지하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저수지의 오리들이 영롱한 윤슬이 달아날까봐 살포시 다가와 말을 건넨다. 더 늦기 전에 가을을 만끽하며 추석마중도 하라고.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 한다. 특히 명암저수지의 윤슬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물비늘이라고도 하지만 왠지 윤슬이라는 말이 좋다. 순우리말이라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저수지가 품고 있는 보석이고 은하수 같아 신비로움을 더한다. 아마 윤 씨 성을 가진 사람 중에 '윤슬'이란 이름도 있을 게다. 이처럼 좋은 이름을 누군가가 새치기라도 해서 차지할 것 같다.

저수지를 낀 산책로에 육거리시장처럼 많은 사람이 운동을 한다. 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앞만 보고 걸어치운다. 가을볕에 일광욕하며 한들한들 춤추는 억새꽃과 코스모스, 이른 저녁 식사를 하려는 듯 헤엄치는 오리, 아가씨 머릿결 같은 치렁치렁한 잎을 물에 드리우려는 수양버들,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윤슬을 바라보며 눈을 정화하고 마음을 더욱 살찌우면 좋으련만.

일부에서 헬조선이라고 자조적으로 일컫는다지만 얼토당토않다. 어느 나라든 장점과 아쉬운 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공중화장실을 보아도 산책하는 사람들만 봐도 우리는 잘살고 있고 어느 나라보다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저수지의 물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저수지의 물도 골짜기에서는 여기저기 부딪히며 급류를 타고 왔듯이, 필자도 지난날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극복하느라 숱한 날을 방황하고 심신(心身)에 멍이 들며, 세파에 떠밀려 급박하게 달려왔다. 지금은 저 저수지물처럼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드린다.

윤슬은 격랑의 물에서 보다 고요히 흐르는 물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거센 물살에서는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 볼 겨를이 없었으니 이 또한 필자가 살아온 길이고 세월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꿈을 품게 해주는 윤슬과 귀엣말하고 손짓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벗들이 있어 무척 즐겁고 나도 가을처럼 누룩으로 빚은 술처럼 무르익고 숙성되고 있다. 때로는 과유불급(過猶不及)과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 등 대자연 속에서 심오한 교훈을 배우고, 쌓인 스트레스도 풀고 재충전도 할 수 있는 산책길이 마냥 소중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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