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을비다. 이런 날 아직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빛낼 젊은이들의 국악연주회가 있어 객석에 앉게 되었다. 관악합주 '정대업'으로 첫 무대를 열었다. 종묘제례 때 쓰이는 음악으로 조종의 무공을 찬미하며 송축하는 음악이란다. 세종 때 만들어졌으며 세조의 뜻에 따라 보태평과 함께 종묘제악으로 채택되었단다. 소무, 탁정, 영관을 연주하는 내내 종묘제례의 장안을 들여다 보는듯한 장엄함에 숨을 죽여야 했다.

경기민요인 경복궁타령을 변주한 곡으로 변화무쌍한 리듬과 개성강한 '궁 타령의 멋'이 이어진다. 자진모리장단에서 서로 장단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흥을 돋운다. 경복궁을 짓느라 고된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이 풍자된 노동요이다. 애잔함이 느껴지는 순간 박진감 넘치는 가야금의 선율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뱃노래는 심청전중 심청이 부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 백석에 몸이 팔려 사공들과 인당수로 배를 타고 가며 부르는 노래이다. 이번엔 남도의 육자배기 토리로 새롭게 작곡한 신민요를 만나게 되었다. 소리꾼들이 무대 뒤쪽에 서고 연주자들이 앞쪽에서 자신의 악기에 혼을 불어 넣는 모습은 추임새가 절로 나온다. 파트별로 심청의 마음을 표현 할 적엔 탄성이 터진다.

칠십 인의 설장구 합주무대로 이어졌다. 세계 최초로 목원대학교 국악과 학생들이 1996년 첫 선을 보였다고 한다. 머리를 숙이고 장구를 가슴에 안은 채 작은 울림을 시작으로 서서히 격정 속으로 들어간다. 일사불란한 몸짓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계신 모든 분들이 만복을 받으라는 연주자들의 염원이 장내에 울려 퍼진다.

'꽃눈 내리는 날'이 이어진다. 봄볕에 화사하게 핀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을 상상하며 봄의 따뜻함을 표현한 곡이란다. 고요한 호숫가에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내리고 어린아이가 손을 내밀어 그림자놀이를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구김살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이의 눈이 언 듯 젖어 있다. 행복한 모습 뒤에 숨겨진 어떤 아픔이 있나보다. 하지만 이내 미소 가득한 얼굴로 아이의 손을 맞잡는다. 따스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해금협주곡 '활의 노래'는 협연자가 속삭이듯 포문을 연다. 관현악의 웅장함 속에 독주 해금의 활로 표현하는 선율은 애절하며 감미롭다. 다양한 리듬 꼴과 주법으로 악기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애간장이 녹아내린다. 마지막 무대는 설장구 협주곡 '소나기'다. 설장구 가락을 반주에 맞춰 여름의 소나기를 표현한 곡이란다. 가뭄으로 타들어 가던 농토가 소나기를 만나 생기발랄해지는 순간이다.

관현악은 화음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연주자들의 조화로운 음악의 대화이다. 지휘자의 손짓, 눈빛을 표현하여 객석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 오늘밤 나의 가슴으로 들어 온 연주자들은 새싹의 기지개와 같지만 명인을 넘어 선 열정을 가졌다. 그 열정으로 전통을 이어 나간다. 전통은 아주 오래전의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하며 변화하고 진화한다. 가을비가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듯이 일상에 녹아 내려 양분이 되고 종내는 전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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