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자기는 점심에 뭘 먹을 거야?” 유학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아직 총각이었던 내가 한국 아가씨(가정의 평화를 위해 지금의 아내임을 밝혀둠)랑 데이트하다 이 질문을 받으면 답은 항상 “난데모 이이요.”였다. “아무거나 괜찮아요.”라는 뜻이다. “또 그 소리야?!” 하는 눈으로 아가씨는 나를 쳐다본다. 표현은 안 하지만 “소문대로 일본사람은 확실하게 말 않는군. 아 우유부단하고 답답해!”라고 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시간이 흘러 그때 그렇게 나를 한심한 존재 취급했던 아내도 뭔가를 선택하는 일에 그다지 재능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슈퍼의 콩나물부터 백화점의 옷까지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 그냥 안사고 나올 때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아내뿐만 아니라 대체로 한국 사람들은 선택이라는 행위를 몹시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TV 홈쇼핑에서 한번 구입했다 반품되는 상품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반품마트’라는 희한한 가게까지 생겨났을까. 소수의 비양심적인 소비자가 계획적으로 구매와 반품 행위를 뒤풀이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여기저기서 반품마트들이 저마다 사업 번창하는 모습을 보면 별로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짬짜면이라는 것도 있다. 중국음식을 시킬 때 짬뽕과 짜장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 두 가지 요리를 한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이다. 이쯤이면 한국 사람들의 선택장애가 꽤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가 남긴 말이다. 여기서 B는 Birth(탄생)을, D는 Death(죽음)을, C는 Choice(선택)을 각각 의미한다. 해석하면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 즉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니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1964년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다. 문화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나누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인습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샤르트르가 B와 D 사이에서 그의 신념에 따라 과감하게 내린 C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몇 세대 전, 평생을 함께 할 결혼상대를 부모가 정해주던 시대가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매우 흔한 일이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도 우리가 선택장애를 앓고 있는 건 그 전통사회의 유령들이 아직도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일까?

사회는 갈수록 혼탁해지고 미래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진학, 취업, 결혼..., 인생의 전반기를 어찌어찌 잘 넘겼어도 방심은 금물이다. 100세 시대 후반기에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고로 인생을 포기하지 하지 않는 한 현명한 선택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쉼 없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고단하기 그지없지만 딱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내 인생을 “난데모 이이요”하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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