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호 청주대 의료경영학과 교수

[정규호 청주대 의료경영학과 교수] 며칠 전 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랜만의 전화라 서로 안부를 묻는 중에 두달 후 어느 날의 일정에 대하여 난데없이 묻기에 아직 일정이 없다하니 주례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있다 보니 제자들의 부탁이 있는 경우에는 어쩔수 없이 가끔 응해 주기는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이고 잘 아는 사이에 주례를 선다는 것이 여간 부담이 아니어서 한참 말씨름을 하다가 결국 반 승낙을 하고, 더 좋은 분을 찾아서 모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례라는 것이 서본 사람은 알지만, 여간 부담스런 것이 아니다. 그나마 직접 가르친 제자인 경우에는 의무감에서 가끔 서면서도 내 삶을 비교 점검하면서 가급적 사양한다. 그런데 친구의 얘기를 듣고 반쯤 승낙한 것은 친구의 아들 얘기를 듣고 나서이다. 친구와 아들이 주례를 누구에게 부탁할까 고민하던 중 아들이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라더라는 것이다. 사실 요즘에는 주례 없이 또는 남들처럼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이름 있는 주변 유명인사에게 부탁해도 될 터인데, 어떤 면에서는 자식을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주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옛날 전통예식을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서구권 문화에서는 기본적으로 교회나 성당에서 결혼을 하였고 신의 대리인인 성직자가 주례를 담당하게 되다가, 근대적 세속주의와 종교분리가 근대정신의 근간을 이루면서 성직자를 대신할 일정 자격을 갖춘 자가 맡았던 것에서 유래되고 있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필자가 오래전 미국에 머물고 있던 기간에 어느 결혼식에 참석해 본 경험을 떠올리면, 그네들은 평소에 자유로운 복장을 하다가도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에는 예외 없이 정장을 하고 의식에 참여하여 정중하게 진행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편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주례없는 결혼예식’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우선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본다. 누구도 잘 듣지 않는 형식적인 주례사는 수많은 하객들을 지루하게 하였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권위있는 지인이 없거나 마땅한 주례를 찾지 못하는 경우 주례를 고용하는 사례도 있으니 이해가 된다. 또한 졸업한지 오래되어 그간 찾아뵙지 못한 은사님이나 교수님을 어느 날 갑자기 주례 부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양가 부모님이 나오셔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애절한 편지라도 읽어 주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그러나 결혼식은 성스러운 예식임에는 틀림없고, 의식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부부’로 탄생하는 인륜지대사임에 확실하다. 최근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작년도(2017년)우리나라 이혼율은 106,000여 건으로(혼인 264,455건) 아시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몇 년 전보다는 다소 낮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꽤 높은 편이며 커다란 사회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성직자나 존경하는 어른이 주례를 맡아야 이혼이 줄어들고, 주례없는 결혼식이 이혼율을 높인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어느 경우에나 결혼 본래의 의미대로 정성스럽고 성스럽게 치러져, 증인들 앞에서 맹세한 언약이 지켜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주례에 앞서 벌써부터 어떤 주례사를 해야 할지 여간 걱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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