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시월의 바람이 좋다. 차거나 후덥지근하지 않다. 향기도 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열정으로 분주했던 시간의 열매들이, 아름아름 맺혀 숙성되어 가는 시간이기에 시월은 풍성하고 평화롭고 넉넉하다. 언덕은 과일향기로 달콤하고,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멀리 보이는 강줄기는 은갈치가 달리고 골골마다 나뭇잎들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사람들을 부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황색광선의 빛으로 달아오른 가을은 한껏, 모두를 품는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강줄기처럼 시간을 이어 온 시간들이다. 어둠속에서 씨앗을 틔우고, 잔인했던 태양의 담금질을 견디고 서있는 시간들이기에 가을은 축제다. 견뎌냈기에, 지나 왔기에 노래 부르며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긴 하루를 지나왔고 견뎠기에, 그리고 안도하고 돌아보는 아쉬움과 회한의 진실이 스며있기에 더욱 곰삭아 맛깔스럽고 넉넉하고 다사롭고 온화하다. 노을은 뉘엿뉘엿 하루를 보내는 사랑의 빛이기에 아침에 떠오르는 해처럼 밝음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이 저려오는 장엄함이 있다.

시월의 산야는 신이 그려 낸 명화다. 하지만 수많은 수목들이 내는 고운 색들은 그들에게는 생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슬픈 서사시다. 엽록체의 파괴로 인해 빨갛게 노랗게 단풍이 드는 것이다. 봄, 여름에 싱싱하던 초록의 물들이 시간을 좇아 빠져 나가면서 그들도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을, 이 계절의 단풍! 생의 마지막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들인가! 추운겨울 내내 빈 가지로 북풍한설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견뎌내더니만.

지나왔기에, 그렇게 지나 온 시간들에 대한 회한들로 하여금 우리는 성장을 한다. 젊은 시절 철없이 스쳐 간 시간들이기에 어쩌면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순의 언덕을 넘어가며 내려다보는 구부정하게 긴 강물은 이 계절에 더욱 반짝인다. 이미 흘러간 시간들이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가을은 풍성하고 넉넉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바람이 분다. 빨간 단풍잎 하나 바람을 타고 떨어진다. 휘리릭 한 점 선을 그으며 내려온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흙도 아니고 보도블럭 사이도 아니고 포도위에서 비행을 멈춘다. 자동차 바퀴에 밟히고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캐한 가스에 질식 되어 포도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스러져 갔다. 고운 단풍잎 하나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사라져 가는 것이 어디 낙엽뿐이랴!

신혼집 때문에 예비 신부가, 폭행을 일삼던 남편이 아내를, 해운대 음주사고 등등으로 생을 잃은 이들. 요즘 한순간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이다. 어이없는 이 기막힌 일들 앞에서 삶의 가치기준이 무엇인지 혼돈이 온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라 했던가! 아름다운 이 계절!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시간 들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갈증이 인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건, 사랑의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과 겨울사이 오늘은 내 가족, 내 친구, 내지인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잘 지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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