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전 단양교육지원청 교육장·시인

[이진영 전 단양교육지원청 교육장·시인] 일본의 작은 마을에 백은 선생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청렴한 수행자였다.  그 이웃에는 예쁜 외동딸을 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딸의 배가 점점 불러오자 부모는 노발대발하며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당장 말하라고 다그쳤다. 겁에 질린 채 울기만 하던 딸은 '백은' 이라는 두 글자를 더듬거렸다. 부모는 당장 그 집으로 달려가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 그런데 백은 선생은 그저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라는 말만 혼잣말처럼 되풀이할 뿐 이렇다 할 변명을 하지 않았다.

딸이 아이를 낳자 부부는 백은 선생에게 아이를 보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선생을 후원하던 손길들이 모두 끊기고 그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오물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동냥으로 아이를 키웠다. 냉대와 조롱 가운데서도 손수 땅을 파고 일구면서 아이를 정성껏 키웠다.

몇 년 뒤 딸은 아이의 아버지가 사실은 어시장에서 일하는 청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딸의 고백을 들은 부부는 그 길로 백은 선생을 찾아가 백배사죄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를 돌려주면서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얼마나 많은 날 마음을 비웠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바쁜 세상에 이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미치거나 모자라서일 거다.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기를 쓰는 이 세태에 이렇게 살면 본인은 물론이고 보는 사람의 복장도 터질 것이다. 단돈 일 원이라도 손해 보기를 극구 거절하는 이 세상에 이렇게 살면 온갖 짐을 다 떠안고 허덕이다가 죽고 말 거다.

그러나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며 나무가 휑하니 알몸을 드러내는 때가 오면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버리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라도 더 가지면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악착같이 모으는 일에 온 힘을 쏟던 지난날이 문득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인생은 모아야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더 풍성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아,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라는 흉내라도 내고 싶다.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면 인생은 뜬구름이다.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면 인생은 다시 오지 않는 유수다. 휑하니 부는 바람을 귓가에 느끼면 모든 게 바람을 잡는 것과 같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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