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주는 깨달음

겨울이 지나는가 싶더니 벌써 한낮의 태양이 눈부시다. 그토록 봄날을 기다렸건만 소리 소문 없이 홀연히 왔다 사라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 철쭉이 차례를 기다리며 하나 둘 꽃 피던 예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벚꽃만 해도 평지인 무심천에서 화려하지만 그윽하게 피고 진 다음에 우암산과 산성으로 형형색색의 꽃물결이 파도타기를 했었는데 올해는 산이며 들이며 도회지 할 것 없이, 개나리 진달래 벚꽃 할 것 없이 단숨에 피었다 지고 말았다.

봄날의 아름다운 소풍을 꿈꾸고 기다린 아이들의 슬픔과 허무를 달랠 방도가 없다. 행여 이글거리는 햇살에 마음을 베이지나 않았는지, 그리하여 봄날에 대한 추억조차 만들지 못하고 거칠고 삭막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 같아 걱정이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됐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이기와 문명은 눈과 귀를 유혹하고 손발 발을 편리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처럼 현학적인 현상들과 가식적인 결과물들은 순간의 쾌락을 가져다줄지 모르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키고 곱디고운 심성까지 앗아간다. 생태계의 파괴, 무분별한 개발, 성장지상주의, 전쟁과 산업화…. 이것들은 지구 온난화, 대기오염, 자원고갈, 성인병과 피부질환은 물론이고 인간을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이 같은 사실은 청주 원흥이 마을의 두꺼비 반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원흥이 방죽과 구룡산 일대에 법원 검찰청이 들어서고,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수백만 마리의 두꺼비가 생사의 기로에 서자 시민사회는 두꺼비 사수에 나섰다. 생태계의 지진계라 하는 두꺼비가 없는 공간은 저주의 땅이나 다름없다. 시민사회는 개발 당사자를 대상으로 수년간의 사투 끝에 두꺼비 서식지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생태관도 만들었으며 세계 각국의 환경전문가와 생태분야 거버넌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꺼비들은 인간의 이기가 만들어 논 덫에 걸려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한 낮에, 이따금씩 봄햇살을 찾아 예술의전당 인근의 잔디밭을 서성거렸는데 문든 발끝에서 봄기운 같은, 꿈틀거리는 그 무엇을 느꼈다.
조그맣고 노란, 앙증맞은 예쁜 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파릇파릇 돋아난 잔디밭 사이에 노란 꽃과 분홍빛 잎을 가진 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꽃천지다. 이곳에서 여러 해를 보냈는데도 왜 꽃천지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동안 무심하게, 속물처럼 살아왔던 나 자신이 야속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나는 꽃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난장이 꼬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잔디밭을 걸을때도 행여 밟히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살피고 또 살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그렇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게 피어 있는 난장이 꼬마들은 자기네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내게 바람같은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후~"하며 꽃잎속에 숨어있던 향기를 내뿜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다정하고 앙증맞던지, 보송보송한 어린아이를 두 손으로 꼬옥 감싸는 것 같은 평온함을 느꼈다.

깊고 느림의 미학, 자연의 신비가 이런 것인가, 새삼 많은 생각과 깨달음의 시간을 갖는다.
어느 시인은 아름답고 고운 것들은 그들을 지킬 힘이 없다며 세월의 변화 앞에 쓰러지고 사라지는 그리운 것들을 목 놓아 불렀다. 지금 여기에서 슬픔 우리들의 자화상을 두 눈뜨고 보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시리고 아플 뿐이다.
시절의 오고 감을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담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세상, 눈부신 봄날의 그 어디선가 자연과 하나 되는 내밀함을 즐길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 변광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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