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온몸으로 물이 든다. 낙엽이 하나 둘 지는 가을저녁, 노을빛에 서 있으면 온 몸이 홍시처럼 발갛게 물이 든다. 언 땅을 다독이며 씨앗을 품고 꺼이꺼이 달려 온 시간들! 하루라는 징한 사연들을 풀어내며 어르고 달래 온 시간들을 품고, 이제 막 서산을 넘어가려는 해가 미련을 두는가! 노을빛이 어찌 저리도 서럽도록 붉은지! ‘평생을 흙을 파고 산 탓이제’ 두 손을 썩썩 비벼대는 소리가 너무 버석거려 부끄러웠나보다. 혼잣말인 듯, ‘나무껍질인지 여자 손인지 나도 모르것소’ 라며 그는 여전히 이 가을볕에 서 있다.

‘요새는 김치 냉장고가 있응께, 하루라도 날씨가 따스울 때 얼른 담가 두고 먹어야제’ 연신 혼잣말을 해대며 배추를 자른다. 무도 뽑고 파도 뽑고. 그녀의 구부린 허리 모습은 마치 묘기라도 부리는 듯, 그의 발과 머리가 같이 땅에 닿아있다. 곁에서 보기에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불안한 모양새인데도 끄떡없이 일을 한다. 평생을 흙과 살았으니 언제 한번 허리 펼 날이 있었을까! 고추 농사 지어 아들딸 삼남매 대학까지 보내고 박사 만들고 공무원 만들고. 서울서 같이 살자는 자식들 뿌리치고, 여전히 흙과 살고 있는 그녀다. 방문 할 때마다 어김없이 농작물이 골고루 들어있는 봉지를 몇 개씩 나의 손에 들려준다. 감자, 고구마, 고추, 옥수수, 파, 상추 등등

‘심심해서 하는 거여, 농약 안치니께, 그 맛으로 먹어봐’ ‘인쟈 나 가고 읎으면 농사도 안 질겨. 우리 애들 다 도시에서 살잖어, 그 때는 여기 있는 땅들은 즈들이 알아서 하것제, 나는 서울이 싫여, 갑갑해서 싫여, 감옥살이 하는 거 같아서 싫여! 그려서 서울이 싫여’ 싫다는 소릴 몇 번 씩 하고 또 한다. 그리곤 활짝 웃는다. 긴 여름이 지나간 자리로 함박웃음을 쏟아 놓는다. 막 뽑아 온 배추며 무우를 내 차에 바리바리 실어 주신다. ‘내 딸 같아서…’

‘정’ 정이 무엇인가! 측은지심에서 우러나오는 애틋한 마음이다. 정말 몹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니 말이다. 크든 적든 사람사이에 오가는 정은 심장이 저린다. 예전엔 이맘때쯤이면 또 다른 풍경이 그려졌다. 지금은 보기 힘든 김장풍경이다. 반으로 갈라놓은 배추 꼬갱이를 엄마 몰래 동네 친구들과 빼먹는 재미와 그 꼬수한 맛을 어디에 비할까! 마당에서 김장 하는 날은 마치 잔치 집 같다. 멀리 사는 가족들이 모이고 이웃도 동네 꼬마들도 모인다. 시끌벅적 김장을 버무리고 갓 무쳐 낸 배추 김치안주에 막걸리도 오가며 정을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삶의 방식이 불편해서 몸은 힘들었지만 사람 사는 맛은 있었다. 그 시절엔 사람의 향기가 있었다.

문명의 발달은 편리해서 좋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이기를 심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면 또 다시 더 오르고 싶은 욕의 늪에 빠져든다. 그 끝은 한이 없다. 사람들은 높이 오르는 회색빌딩을 따라 점점 더 높이 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찬란했던 하루해도 덕지덕지 묻은 이승의 때를 털어내고 싶은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내려놓는 마음이 저리도 붉도록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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