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학을 주도한 인물들

이득윤(1553~1630)과 산동학파(山東學派)라는 용어는 기존에 통용되는 학술용어가 아니다.
이는 16세기후반~17세기중반 지금의 청원군 일원에서 괄목할 만한 문예활동을 한 이득윤과 그 문하생들의 업적을 찬양 추모하고자 필자가 사용한 용어이다.

이득윤은 지금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 정사호(1553~1616)는 그 인근 화창리, 신지익(1588~1649)은 그 인근 가양리 풀무골에 거주했다. 신득치(1592~1656)는 지금 충북 청원군 낭성면 묵정리에 거주했다.

이득윤(1553~1630)과 그 후손들이 학술문예적 업적과 청주사림에 끼친 영향을 개괄한다. 이별이 '장육당육가'를 지은 후, 그 후손 이정이 '풍계육가', 이득윤이 '서계육가', '옥화육가', 그 아들 이홍유가 '산민육가' 를 지었으니, '육가'를 창작하게하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이득윤은 서계구곡 '옥화구곡을 설정했으며,거문고에 관한 기록을 모아 '현금동금유기'를 남겼는데 이는 한국음악학계의 주목받는 저술이다. '농금암(弄琴巖)' '상읍암'이라는 글씨가 가양리 그 유허지에 남아있다.이홍유(1588~1671)의 '둔헌집'에 신득치가 낙우당구곡(樂愚堂九曲)을 설정했다는 기록과 차운시가 전한다. 이홍유의 장남 이만헌의 '소산집'에 괴산군 청천면 선유팔경의 설정자 이녕(李寧)의 생애에 관한 자료를 남겼다.

서계의 후손 이필영(1853~1930)과 그 아들 이규익(1884~1972)은 선조의 문풍을 이어받아, '옥화구곡시'를 지었다.
청주지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림들중 상당 수가 이득윤의 문하생이다. '서계선생연보'에 28명의 제자의 명단이 수록돼있다. '낭성팔현' 중 '이덕수(1577~1645)' '홍석기(1606~1680)'가 서계의 문인이다. 또 그 문인중에는 이시발과 한백겸등 지명도있는 인물들도 포함돼있다. 지금 북일면 비상리 변시익, 지금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 청룡리일대에서 활동했던 윤승임이 그의 문하생이다.

신득치는 낙우당구곡을 설정했으며 신지익은 '야계팔경'을 설정했다. 이홍유의 '둔헌집'에 '야계팔경시'가 전한다. 홍석기는 지금 청원군 미원면 후운정리에 은거하며 창작활동을 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6세기 이후 청주지역 문학예술을 주도한 인물들은 이득윤의 문하생들이다. 서인계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도 이덕수의 형 이덕사의 사위로 청주 주성리에 거처한 적이 있다.

산동은 상당산 동쪽을 말하며 지금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 운암리·가양리·어암리를 비롯해 낭성면 일원,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6~17세기 청주지역 문화예술의 주된 창작공간은 산동일원이며, 이득윤과 그 가문 그리고 정사호와 그 가문이 주도했다.

충북 전시대 역사를 통털어 살펴보아도 이 시기보다 더 집중적·집단적·지속적으로 왕성한 문예활동이 전개된 적이 없다. 따라서 논자는 16~17세기 청주지역에서의 이들의 학술문예사적 업적과 영향력을 높이 평가찬양하는 뜻에서, '산동학파'라 명명하고, 16·17세기 청주지역의 '문화사(文化史)'를 '산동학파시대'로 규정한다.

▲ 이상주 극동대 외래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