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 사설] 당연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가볍게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것을 지키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합리한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계속 심화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하는 안타까움으로 보여지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본보는 올해 캐치프레이즈를 '원칙이 바로 선 사회'로 정했다. '원칙이 바로선 사회'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도 의미를 같이 한다고 본다. 과거부터 잘못된 관행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다면 원칙이 왜곡될 것이며, 적폐의 골도 깊어질 것이다. 알고 있지만 잘못 행하는 것은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만 못 하다.

'방 안의 코끼리'. 모두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면서 누구도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괜히 잘못된 상황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 같은 불안감이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칙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용기가 원칙으로 정의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초석이 될 것이고, 그 용기에 힘을 더하기 위해 올해 본보의 캐치프레이즈를 '원칙이 바로 선 사회'로 정하게 됐다.

지난해 사회적 이슈가 됐던 '미투' 광풍을 기억할 것이다. 사회 속에서 상대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관습으로 우리 주변의 친구와 가족들이 큰 아픔을 겼었다. 또한 일자리 부족으로 힘들어 하는 구직자들은 특권층의 인사 개입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얻기도 했다. 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칙이 아닌 데도 나의 이익을 위해 한 순간 눈감고 용인한다면 과연 온전한 원칙이라 할 수 있을까? 대중가수의 가사 중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막 대하고…'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 규범의 기준이 되는 법률 구조에도 보면 '조리(條理)'가 있다. 이치에 맞도록 인간과 사물이 행동하거나 존재하는 상태로서, 실정법이나 관습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최종적으로 의지해야 할 법원(法源)이다. 모든 기준을 초월해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로 잰 듯 한 원칙이 우리 삶에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원칙 없는 기준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원칙이 엄청나게 대단한 부분이나 사회적 큰 이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교통질서를 잘 지켜야 함은 이미 유치원부터 배워온 것이다. 또한 연말연시를 맞아 몇 번 쯤은 모임 자리가 있을 것이다. 술을 강권하지 않는 회식 자리,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 원칙 등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할 것이다. 어린이에게 배우라고 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작 본인은 원칙을 잊고 생활하며, 자녀에게 올바로 행하라고 하는 것은 옆으로 걷는 게에게 자신도 옆으로 걸으면서 앞으로 걸으라며 호통을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스스로가 옆으로 걷는 게였는지 새삼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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