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바람이 거칠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둘둘 말아도 한기가 목을 파고든다. 거리로 나섰지만 좀처럼 구미를 당기는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를 때울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긴 한데 하고 머리를 돌리는 순간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도 정겨운 할머니 손칼국수 이다.

육수는 오래된 깊은 맛을 낸다. 어사리 과부댁이 함지박에 이고 온 바지락과 멸치로 육수를 내고 텃밭에서 애호박이랑 고추를 따다 송송 썰어 고명을 얹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어머니가 내어 주던 추억의 맛이랑 닮았다. 그래선지 어머니가 그리울 땐 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박처루로 가시기전 어머니도 이집의 국수를 즐겨하셨다. 슴슴하며 과하지 않은 것이 결성장터에서 아버지와 드시던 맛이라고 하셨다.

입맛을 잃었을 땐 얼큰 칼국수가 제격이다. 집에서 띄운 메주로 장을 담가 장독대에 정갈하게 모셔 둔단다. 해를 넘긴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만든 양념은 텁텁하지도 않고 잡내를 없애준다. 해물을 넣어 개운한 맛을 더해준다. 고뿔이라도 걸렸을 적엔 한 대접 먹고 집으로 돌아와 한숨자고 나면 금방 차도가 보인다.

콩국수는 식당마다 여름상품으로 내 놓을 만큼 흔한 메뉴이다. 자칫 잘못 먹으면 배앓이를 하기 쉬워 선뜻 주문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집만큼은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않고 순수한 콩만으로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낸다. 얼음 한조각 보이지 않지만 시원함은 가슴속 깊숙이 파고든다. 기운이 떨어질 때 먹으면 보약을 먹은 듯 여름나기가 수월해 진다.

가끔 철질 냄새가 그리울 때는 파전을 한 접시 주문해도 좋다. 갖은 채소와 갯것을 잘게 썰어 넣어 즉석에서 부쳐 내는 맛은 냄새만으로도 허기가 채워진다. 느끼하지 않으면서 신선한 재료들이 내는 본연의 맛들은 씹을수록 깊이가 더해진다. 막걸리 한 병 주문해서 술잔을 부딪혀 보아도 좋을 듯 하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떡만둣국이다. 만두소는 안심과 갖은 채소를 다지고 두부와 잘 버무려 빚어내었다. 고향 홍성은 만두보다는 떡국을 주로 먹었지만 이북과 가까운 시댁 파주에서는 만두를 자주 빚어 먹었다. 자식들이 간다는 소식을 전하면 어머니는 밤낮으로 만두를 빚었다가 집에 도착하지마자 떡만둣국을 한상 차려주셨다. 찐만두를 한 접시 먹어도 좋지만 그리움 때문인지 이집을 찾을 적마다 자주 주문하게 된다. 매콤한 것이 담백한 국물과 어우러져 어머니의 따뜻한 내음이 온전히 내게 전해진다.

할머니 손칼국수는 동네 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로 정겨운 간판이다. 하지만 다른 어느 집에서도 이처럼 따스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강내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이십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세상의 흐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할머니가 만들어 내는 한 그릇의 국수가 맛나다. 층층시하 어른들을 모시다가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하고자 칼국수를 밀었다는 그의 마음이 담겨서 일게다. 군대 간 아들이 휴가 나오면 꼭 데려오고 싶다. 더 늦기 전 양가 어머니를 모셔 대접해 드리고 싶은 음식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