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개화를 이끈 선구자

유길준은 조선 개화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사상가, 교육가, 계몽운동가, 이 모든 수식어를 합해도 모자랄 복합적인 인물이다.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유럽을 돌아본 조선인 최초의 유학자였던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주어졌던 선구자적 삶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고자 조국의 근대화와 국민의 개화를 위해 삶과 학문을 고스란히 바쳤다.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귀국하자마자 7년간 구금돼 지내면서도 언젠가는 우리나라에 개혁이 일어날 것으로 여기며 그때 자신의 글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믿고 쓴 책이 바로 <서유견문>이다.

그는 감탄할 정도로 겸손하고 정직하다. 보고 들은 바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며 주관적 견해는 배제했다. <서유견문> 서문에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해 남의 책을 가져다 정리한 것을 "남들이 이야기한 찌꺼기만을 주워 모아 이 기행문에 옮겨 쓴 것이 마치 꿈속에서 남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자신의 글재주 없음이 마치 "서투른 화공이 자연의 뛰어난 참모습을 마주하고도 삼매경에서 접신하는 의장(意匠)이 없고, 구태의연히 호리병박을 그리는 것 같아 안목 있는 이들에게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자신을 낮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워 노는 자들에게 한 번 읽을거리로 제공해 지척에서 만 리 밖을 논하는데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 외국을 전혀 접해보지 못한 국민들에게 세계를 알려주고자 하는 글을 취지를 밝혔다. 그는 한문을 중시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쉽게 뜻을 전달하기를 바라며 <서유견문>을 한글과 한문을 혼합한 문체로 썼다. 문장에도 뛰어나 과거에 응시해 출세의 길을 밟을 수도 있었지만, 19살에 과거준비를 그만두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과거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갑오경장 때는 개혁의 선두에 섰으나 실패로 끝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5년 귀국한 뒤로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여생을 교육과 계몽운동에 전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가 계속될 것으로 보았으나 유길준은 우리가 언젠가는 주권을 되찾을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무엇보다 교육과 민족 산업 육성이 근본이라 여겼던 것이다. 1910년 일본정부가 작위를 내리지만 그는 "국망신영(國亡臣榮)하는 이치는 강상(綱常)에 없는 법"이라며 끝내 거절했다.

만년에 그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국수주의를 옹호하며 단군과 사천년 역사를 강조했다.
단군 신봉은 종교로서보다는 "위기에 처한 국권에 대한 애타는 확인이며 실국에 처한 민족긍지의 강조"라 할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국권의 상실을 바라보면서도 끝내 막지 못한 데서 느끼는 무력감과 허무감 속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당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많은 문명개화론자들이 유교를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유길준은 "공자는 정치도덕의 성(聖)이고, 예수는 종교도덕의 신(神)"이라며 유교의 가치를 인정하는 포괄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망국의 회한과 가책으로 가족들에 곡도 하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한다. 1914년 9월 30일 자손들이 읽어주는 <신약성서>를 들으며 비로소 영혼의 위로를 받았을 고독한 선각자의 고달팠던 삶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

▲ 황혜영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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