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천 입시학원장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정의기억 연대’의 회계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 단체는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반인륜적 전쟁범죄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피해자인 위안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헌신한 것인가, 아니면 그 피해자를 앞세워 개인의 이득을 취한 것이냐가 쟁점인 것 같다. 헌신과 희생이 크다면 봉사가 맞고, 그를 빙자한 이득이 크다면 장사가 맞을 것이다.

이 논란을 보며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가 떠올랐다. 형제 감독으로 유명한 코웬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라는 영화다. 냉소적 유머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2018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몇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였는데 그중 하나인 밥줄(meal ticket)이란 에피소드가 특별히 기억난다.

영화는 마을을 떠도는 나이 든 극단장과 팔다리 없는 소년 둘뿐인 극단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소년은 무대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창세기 등의 고전을 암송하고 단장은 관객들에게 돈을 걷으며 연명한다. 소년은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몸이기에 단장이 모든 것을 챙겨주며 돌봐준다. 그러다 관객들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소년의 처지는 점점 소홀해진다. 마침내 어느 공연에서는 관객 모두가 돈을 내지 않는 일까지 생긴다. 소년의 공연은 외면당하고, 사람들은 덧셈 뺄셈을 한다는 닭을 보여주는 극단 앞에 몰려있다. 단장은 그 닭을 사서 돌보기 시작하고,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소년은 불안에 빠진다. 불안한 동행 중 어느 깊은 계곡 옆에 마차가 멈추고 소년을 태우지 않은 마차는 다시 길을 떠나며 에피소드는 끝난다.

영화 속의 단장과 소년의 관계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단장은 팔다리 없는 소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보살피고 헌신하는 자인가. 아니면 불우한 소년의 재능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장사치였는가. 그도 아니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생하다 필요가 다하자 버리는 비정한 거래의 관계였는가. 연민으로 시작해, 필요에 의해 공생하다가 짐이 될 뿐인 현실이 되자 버리게 되는 복합적인 관계가 진실이지 않았을까. 악 또는 선으로만 구성된 사람보다는 복합적인 게 인간의 흔한 모습이다. 그 행위에 대한 비난과 존경의 기준은 그 행동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일 것이다.

예를 들어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과 좋은 농산물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용자 사이에 직거래가 된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당연히 유통업체가 존재하고 이 유통업체를 통해 농민과 사용자는 각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유통업체가 양자의 사이에서 이익을 독점해서도 안 될 것이고, 비용 없이 봉사로만 진행한다면 지속적인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유통마진이 적을수록 봉사와 헌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유통마진이 클수록 영리적 목적을 가진 장사치일 것이다. 봉사와 헌신의 탈을 쓴 장사꾼을 골라내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세상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바른 시민단체의 행위가 위축돼서도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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