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 재배면적 확대

충북도는 18일 금년도 통일벼재배면적을 지난해의 8천㏊에서 1만㏊로 확대하고 이에 따른 종자를 시·군에 공급키로 했다.

시·군별 재배면적과 종자 공급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단위는 ㏊ 괄호 안은 종자 공급량 단위는 ㎏)

△淸州=2백(8천) △忠州=2백50(1만) △淸原=2천7백(10만8천) △報恩=9백(3만6천) △沃川=6백50(2만6천) △永同=6백50(2만6천) △鎭川=9백50(3만8천) △槐山=1천(4만) △陰城=1천3백(5만2천) △中原=1천3백(5만2천) △堤川=50(2만2천) △丹陽=50(2천)

<8587호·1973년 1월 20일자 1면>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

정부가 혼식(混食)을 강요하던 시대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도시락을 까뒤집으며 쌀과 보리쌀이 얼마만큼의 비율로 섞였는지 검사했다. 하지만 따져볼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때 웬만한 집이 아니고서는 정부가 보리쌀을 섞어 먹어라 하지 않아도 혼식을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쌀의 자급자족이 어렵던 시기였다. 아니, 그보다는 끼니가 늘 걱정되던 때였다.

혼식을 장려하는 노래도 있었다.

꼬꼬댁 꼬고 먼동이 튼다 /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 /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그땐 달달달 외워 불러야 할 노래가 왜 그리 많았던지.

새마을 노래, 동네 한 바퀴, 걸어서 가자, 나의 조국 등 줄줄이 사탕이었다. 그걸 외워지 못하면 선생님들은 또 얼마나 닥달을 해댔던지. 하기사 노래만큼 파급력이 큰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백제 무왕 ‘마동이’가 신라의 선화동주를 취하려고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던 ‘서동요’가 있었으니,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파급력을 알고 있었나 보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을 견디게 해준 쌀이 통일(統一)벼였다. 통일벼는 1970년대 주곡인 쌀의 자급을 달성하게 한 신품종이었다. 1960년대 후반 농촌진흥청 주도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 파견된 허문회 서울대학교 교수가 개발했다. 시험재배를 통해 다수확성이 확인되면서 ‘기적의 쌀’로 주목을 받았고,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보급됐다. 냉해에 약하다는 단점은 늘 문제로 지적됐다.

통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신품종은 전국적으로 재배되면서 쌀 수확량을 높였고, 이에 힘입어 1977년에 쌀의 완전 자급을 달성하게 됐다. 맛은 솔직히 ‘별로’였다.

쌀의 자급을 이루게 됨에 따라 그동안 대표적인 절미정책이었던 무미일(無米日)이 폐지됐으며, 여러 쌀 수요 억제책들도 완화됐다. 특히 쌀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 만인 1977년 12월에 쌀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는데, 쌀막걸리의 등장은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었다.

통일벼는 그 후 맛이 없다는 ‘구박’으로 한국에서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0년대 들어 ‘냉해’를 입을 일이 없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호평을 받으며 부활하게 된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