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월남 한국군 제1진 개선

越南戰(월남전)이 종식된 이후 駐越韓國軍(주월한국군) 撤收(철수) 1(1) 先發隊(선발대) 000()30() 下午(하오) 3() 30() 美空軍基地機便(미공군기지기편)으로 水原(수원) 空軍基地到着(도착), 개선한다.

이날 水原에 개선할 撤收 第1越南 休戰協定(휴전협정) 發效(발효)에 따라 全面(전면) 撤收하는 38천명의 駐越韓國軍 先發隊이다.

政府(정부)自由(자유)十字軍(십자군)으로 越南戰線(월남전선)軍威(군위)勇猛(용맹)을 떨치고 개선하는 이들을 맞기 위해 이날 下午 4時 水原 空軍基地에서 유근창 國防次官(국방차관)軍高位層(군고위층) 및 조병규 경기도지사·市民(시민學生(학생)들이 參席(참석)한 가운데 大大的(대대적)歡迎行事(환영행사)를 갖고 榮光(영광)의 개선을 하는 將兵(장병)들을 歡迎한다.

<8596·1973131일자 1>

 

아마도 50년 전 쯤 됐을 것으로 기억된다. ‘다시 보는 충청일보, 50년 전 오늘코너와 얼추 비슷한 과거였을 것인데, 장대비가 쏟아지던 여름 어느 날 군복을 입은 친척 아재가 집으로 찾아왔다.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검게 그을린 얼굴의 그 아재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몸 상한 데 없이 잘 다녀왔네 그려하시는 아버지의 환한 얼굴에 먹을 것 좀 가져왔는데, 얘들 주세요하면서 선물 한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갖가지 빵에, 그땐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초콜릿, 사탕, 과자 등속이 좌르르 쏟아졌다.

월남전에 파병갔다 온 뒤 아버지를 찾은 아재가 말했다.

사람 죽는 게 다반사니, 제 감정도 참 무뎌진 것 같아요.”

어린 날의 기억이었기 때문일까 월남전에 연상되는 이미지는, 비 오듯 쏟아졌을 포탄과 총탄, 그리고 젊은 군인들의 죽음보다 잊지 못할 맛을 안겨준 선물보따리였다.

한국군의 월남파병(越南派兵)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엔 파병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두 가지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6·25 한국전쟁 당시 파병해준 미국에 대한 보은이라는 명분과, 파병을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라는 실리가 그곳엔 있었던 것이다.

패전 이후 폐허가 됐던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면서 경제적 부흥을 맞았던 사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최초의 파병은 1964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됐고, 이후 19652월 비둘기부대 2000여 명, 10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를 파병했다.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도 파병됐다. 1966년 미국의 추가파병 요청으로 4월 혜산진부대가, 8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월남파병 국군은 48000여 명.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19685월부터 휴전협정이 시작됐다. 이에 따라 1971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3월까지 철수를 끝마치게 된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8년 동안 34만여 명이 참전해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잔혹한 민간인 학살과 라이따이한등의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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