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닌 집안에 하다못해 손톱깎기만 없어져도 내게 전화해 그것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어디 이뿐인가. 어머니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내게 전부 의지한다. 어머니의 생활을 하나하나 챙겨 드리는 게 자식의 도리이련만 어느 땐 삶에 쫓겨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이럴 땐 괜스레 어머니께 죄스럽고 마음이 편치 않다.

지난날 어머닌 우리들을 키울 때 당신의 헌신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기에 이렇듯 어엿한 한 인간으로 성장하였잖은가. 하지만 자식인 나는 그런 어머니의 희생과 숭고한 사랑을 잠시 잊은 채 나 살기 바쁘다고어머니께 소홀히 하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어머닌 아직은 한창 당신 수신을 스스로 할 연세지만 매우 심신이 쇠약하다. 몇 해 전 막내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받은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이렇듯 심신이 허약한 어머니이다 보니 나또한 늘 노심초사이다. 이럴 때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어머니께서 당신 삶을 자식에게 의지하기보다 아버지께 많은 것을 의존 할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앞선다.

또한 노후엔 누구나 젊은 날에 비해 심신이나 경제력이 미약해져 어떤 돌발 사태를 혼자 해결하기엔 힘이 부친다. 그런 연유로 새삼부부의 해로에 대한 중요성이 일깨워진다. 더구나 노후엔 남성보다 여성의 삶이 더 힘들다는 뉴스를 요즘 접하곤 더욱 노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흔히 '홀아비는 이 가 서 말이다'라는 옛말을 통해서 보더라도 젊으나 늙으나 홀로 됐을 때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삶을 더 잘 꾸려갈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해왔었다. 이런 현상은 노년의 삶에 이르러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에 비해 더 삶의 질이 높다는 통계엔 의외였다.

나의 친정어머니의 경우를 보더라도 당신 스스로 해결하는 게 별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통계가 일리가 있는 듯싶다. 노후는 누구나 머잖아 맞이하는 삶의 순리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노후 대비를 하고 있을까? 나 같은 경우만 하여도 그동안 아이들 셋 키우랴, 내 집 장만하랴, 남편 세 번의 사업 자금 대랴, 노후 대비엔 소홀했던 것 같다. 나뿐 만이 아니라 베이붐 세대들의 노후 대비 역시 나와 처지가 비슷하리라 미뤄 짐작한다.

그러고 보니 가장 든든한 노후 대비는 배우자의 건재라면 지나칠까? 솔직히 젊은 날엔 남편의 존재를 그다지 소중한 줄 몰랐었다.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호탕한 남편의 성격이 마음에 안 들었고 내 것 아까운 줄 모르고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남편의 성품이 야속한 적도 많았었다. 어디 이뿐인가. 지난날 사업을 하다가 세 번씩 주저앉았을 땐 결혼을 후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 들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나의 허물까지 끌어안는 사람은 남편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일일까? 아무리 황혼 이혼과 조기 이혼, 독신주의가 성행하는 세태라지만 이는 그야말로 철부지들이나 행하는 행동이라고 감히 힘주어 말하련다. 사회적 신분이 높아도 물질이 풍부해도 배우자의 따뜻한 손길을 어찌 뒤따르랴. 늙어서 등 긁어 주는 배우자가 곁에 없다면 부귀와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비로소 이것을 깨우치게 되니 나또한 뒤늦게 철이 드는가 보다.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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