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출근길 국도변에 10년쯤 돼 보이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빨갛게 물든 걸 보니 올 가을도 깊어지는가 보다. 이제 들녘의 가을걷이가 거의 끝났지만 태풍도 안 오고 좋은 날씨가 계속된 덕에 논이고 밭이고 올해 농사는 역사적인 대풍이라 한다. 너무 풍작이라 제 값을 못 받는 농민들이 울상이라는 보도를 보면 한편으론 마음이 아프지만 없어서 못 먹는 것보다는 역시 넉넉한 것이 좋은 것 같다. 한국의 먹을거리하면 그 으뜸은 김치일 것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 온 1988년만 해도 일본에서 김치는 그리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러다 서울올림픽이 전 세계로 위성 중계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덩달아 김치도 일본사람들의 식탁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2004 월드컵 이후 한류열풍이 불고 나서부턴 김치는 일본관광객들이 사가는 선물 리스트의 단골로 자리 잡았다. 가끔 내가 일본에 귀국할 때면 친구들은 모두 다른 건 필요 없으니 김치만 사오라고 아우성이다. 일본 가정집 냉장고를 열어보면 쉽게 김치를 찾을 수 있다. 아직까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기무치'를 먹는 사람도 있지만 음식 맛을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꼭 한국김치를 고집한다. 김치의 맛은 가히 예술적이다. 마법의 맛이고 지복(至福)의 맛이다. 배추는 물론 무, 파, 마늘, 생강, 새우젓, 굴... 뭍에서 난 재료, 바다에서 난 재료, 여러 식재료가 혼합돼 만들어낸 다채롭고 풍요로운 맛은 발효가 진행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카오스(혼돈)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잘 익은 김치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뚝딱이다.

게다가 영양가도 일품이다. 김치는 일본의 낫또, 스페인의 올리브유, 그리스의 요구르트, 인도의 렌틸콩들과 함께 세계 5대 건강식품 중 하나다. 비타민 A, B, C는 물론 섬유질과 유산균이 풍부한데다 항암효과도 있어 전 세계적으로 웰빙식품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일본사람들은 보통 김치라고 하면 배추김치만 있는 줄 아는데 깍두기·동치미·나박김칟파김칟갓김치 등등 90종류를 넘는 다양한 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라고, 한국에는 김치전용 냉장고가 있다고 하면 두 번 놀란다. 김치하면 김장김치인데 맛도 맛이지만 나는 김장할 때의 풍경이 정말 좋다.

의식주(衣食住)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食)인데 먹는 것을 함께 창조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가족들, 동네사람들 모두 모여 함께 하는 김장은 행복하고 신성한 한국최대의 문화행사다. "병희네 둘째 사위는 일본사람이지만 김치 담그는 모습이 완전이 한국사람 다 됐구먼." 내복에다 추리닝, 파카까지 껴입고 열심히 김치속을 버무리는 나를 보고 동네아줌마들이 깔깔 웃는다.

요즘은 절인배추를 따로 사다 김장을 하는 가정이 늘었다지만 배추며 무며 파며 장인어른께서 집 뒤 텃밭에서 손수 농사지으신 싱싱한 재료만 쓰니 우리 장모님표 김치는 그 맛도 품질도 기가 막힌다. 최근 김치를 사다먹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쉽고 간편한 게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1년에 한번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김장의 풍경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