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12월, 자신의 생일을 위한 기자회견장에 나온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발언은 그 자리를 메운 기자들은 물론 일본국민들도 깜짝 놀라게 했다.그의 입에서 "일본 황실에 백제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명치유신에서 2차세계대전에 이르는 근대화 과정에서 '신의 직계후손'으로서 신격화된 천황을 앞세워 침략전쟁을 주도했던 일본에서는 패전 후 천황의 혈통을 운운하는 것을 금기시해온 터라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천황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을 표명하는 우익의 일각에서조차 그 발언을 놓고 비판이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천황의 발언의 근거는 이렇다. 고닌천황(光仁, 49대,770~781)은 무령왕(武寧王, 25대, 501∼523)의 후손 화을계의 딸 다카노니이가사와 혼인, 칸무천황을 낳았으므로 일본 황실에 백제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칸무천황은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지금의 교토로 옮기고 불교세력의 정치개입을 차단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 고대사의 황금기라 불리는 헤이안시대의 막을 열었던 역사적으로 비중이 큰 인물이다.


일본과 백제는 그 전부터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왔었다.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에 위치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는 근초고왕(近肖古王, 13대, 346~375)이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돼 있고,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은 사가현 가라쓰시 가카라섬(加唐島) 태생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6~7세기의 황실을 능가하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소가(蘇我)씨도 백제8족의 하나인 목(木)씨에서 나온 가문이라고 한다. 고대 일본 최고의 정치인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성덕태자(聖?太子)도 소가씨를 외가로 두고 있다.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백제가 멸망하자 20만 명 이상의 백제인들이 일본에 망명을 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비해 월등히 앞선 문화를 가진 백제인들은 일본 정부의 요직에 임관되거나 사공(寺工), 기와박사 등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산업의 각 분야에 지도자로 영입된 자도 많았다. 헤이안시대 초인 811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의하면 당시 일본의 대표적 성씨 1182개 가운데 무려 백제계가 120여 개로 전체의 10%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중 으뜸은 '백제왕(百?王)씨'일 것이다. 이 가문은 의자왕의 아들이면서 일가를 데리고 일본에 망명한 선광(善光)을 시조로 해 대대로 조정에서 벼슬을 지냈고 8~9세기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 일본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었으며 8대 풍준(豊俊)의 대에 삼송씨(三松氏)로 개성하게 됐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충남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 입구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밑둥 부분을 자세히 보면 현재 오사카에 사는 백제왕의 후손 삼송 아무개가 식수했다는 문구가 새겨진 작은 비석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의 공동개최를 앞두고 아마도 아키히토 천황은 국내^외로부터 오해와 비난 받을 것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한^일 양국의 오랜 역사와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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