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보다 300년 앞서 사회계약설 설파...민본 애민사상 바탕…재상중심정치 주장

삼봉 정치·사회사상의 핵심은 "군주보다는 국가가, 국가보다는 백성이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므로 군주는 백성을 위하고[위민(爲民)], 백성을 사랑하고[애민(愛民)], 백성을 존중하고[중민(重民)], 백성을 보호하고[보민(保民)], 백성을 기르고[목민(牧民) 또는 양민(養民)], 백성을 편안하게[안민(安民)]해야 한다."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었다.

먼저 삼봉이 창전한『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부전(賦典)」「부세(賦稅)」항목에는 "통치자는 법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주어야만 민생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기에 백성은 1/10을 세로 바쳐 통치자를 봉양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기를 봉양해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 역시 중한 것이다. 후세 사람은 부세법을 만든 의의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 '백성들이 나를 공양하는 것은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렴주구를 자행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백성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서 서로 일어나 다투고 싸우니 화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내용은 벼슬아치들이 법이라는 공평한 잣대로 백성들 사이에 평화와 안정을 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세금을 내는 것이라는 일종의 '사회계약사상'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맺고 정부를 세운다.'는 계몽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 1632~1704)의 사회계약설보다 무려 3백 년이나 앞선 시기에 이미 사회계약설의 핵심을 설파하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지만, 삼봉이 생각한 정치의 본질은 윤리적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였다. 이는 군왕이 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각 조직이 자기 역할을 해나가는 정치제도로서 지금의 내각책임제와 비슷한 제도였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제도와 상당히 유사한 재상중심주의에 대해 "왕조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주장한 삼봉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간(臺諫)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본 체계를 잡기 위한 노력을 밤낮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삼봉의 이런 입장은 왕권중심주의를 신봉하던 태종 이방원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대 군주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기에 개혁군주인 영·정조(英·正祖)를 제외하고는 조선왕조 내내 만고역적의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하다가 사후 467년 만인 고종 2년(1865)에야 비로소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복권됐던 것이다.

광해군 때 조선 명문가로 꼽힌 양천 허씨 가문의 적자로서『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교산 허균이 특출한 재능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면서도 서얼 출신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워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반역을 꾀하다가 역모죄로 체포됐을 때, "역적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했으며「동인시문(同人詩文)」을 뽑을 때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듯이 그가 삼봉의 시를 좋아한 것조차 역모의 증거로 제시될 정도였다.

한편, 맹자(孟子)에 의하면 통치권은 '하늘의 명령', 즉 '천명(天命) = 천공(天工) = 천리(天理)'에 의하여 부여되고 합리화되는 것으로서, 천명이 떠나면 통치권은 소멸되고 덕이 있는 다른 자에게 천명이 옮아가서 그가 새로운 통치자로서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처럼 부덕한 통치자에서 유덕한 통치자로 천명이 바뀌는 것을 곧 혁명이라 하며, 천명이 성이 다른 자에게 돌아갈 때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통치자가 민본·애민의 도덕규범을 저버리고 이에 위배되는 악정을 베푼다면 언제든지 역성혁명은 가능하다는 것인데, 삼봉은 맹자의 이 역성혁명론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주장하는 유가의 도덕주의 및 사회참여론을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논리로 삼았을뿐더러,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여기서 삼봉의 민본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전제개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삼봉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색 및 같은 문하생이면서 한때는 뜻을 같이했던 정몽주 등과 갈라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최대의 정적 관계가 된 근본적 이유도 바로 이 전제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사유지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리대로 자영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은 예사고, 심지어는 무력을 사용해 약탈하거나 강점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산천으로 그 경계를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영농민들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이색·정몽주·이숭인·길재 등의 온건파는 자기네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 땅의 소유자인 지주와 소유자를 대신하여 농사를 짓는 소작농 제도)'를 옹호했다. 반면에 조선왕조 개국에 적극 참여한 급진파는 대부분이 신흥사대부들로 권문세족의 물질적 기반인 사전을 혁파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실권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경자유전(耕者有田 : 농사를 짓는 농민이 땅을 소유함)'을 주장하면서 '계민수전(計民授田 : 또는 '계구수전(計口授田)'이라고도 하는데,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 나라 안의 모든 농민들에게 식구 수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임)' 방식의 가장 철저한 전제 개혁을 지향했던 것이다.

삼봉이 전제개혁을 추진한 배경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삼봉의 모계가 천인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이는 삼봉을 두 번 죽이는 짓일 뿐이다. 삼봉은 전라도 나주 부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체험한 비참한 농촌 현실과 삼봉이 초옥을 짓기 전에 임시로 기거하던 집의 주인인 농부 황연(黃延)의 위로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경험담들을「소재동기(消災洞記)」에서 그대로 밝혔듯이,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가 최고조에 이르고 사병이 혁파되면서 이에 협조를 거부하던 반대세력이 궁지에 몰려 있을 즈음, 다섯째 왕자 이방원은 삼봉으로 인해 왕실 세력이 위축되고 중신 중심의 집권 체제가 강화되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는 난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태조가 궁중에서 심한 해소병을 앓고 있는 틈을 타 셋째 형 익안군 방의(益安君 芳毅)와 넷째 형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을 불러들이고 처남이던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 형제와 하수인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을 동원해 1398년 8월 26일 새벽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는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 모여 있던 송현동 남은의 첩 집을 급습하여 삼봉과 남은·부성군 심효생(富城君 沈孝生) 등을 살해한다.

삼봉의 최후와 관련하여『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삼봉이 이웃 민부(閔富) 집으로 피신했다가 그의 고발로 이방원 앞에 끌려나오자, "옛날에 그대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며 비겁한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참수당하기 직전에 삼봉이 읊었다는「자조(自嘲)」라는 다음의 시에는 오히려 그의 혁명가다운 기개가 오롯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繰存省察兩加功 내 몸을 바로잡고 세상을 살피는데 공력을 다해 살면서

(조존성찰양가공)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린 적이 없었노라

(부부성현황권중)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업적이

(삼십년래근고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헛되이 사라졌네.

(송정일취경성공)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은 요동정벌이라는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마지막 야망을 펴보지도 못한 채 허망한 최후를 맞고 말았지만, 삼봉을 비명에 가게 한 태종조차 개혁의 기본 방향만큼은 삼봉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고,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세계 왕조 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500년 역사를 이어갔던 것이다.

세조 11년 영의정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는 삼봉의 증손자였던 야수 정문형(野叟鄭文炯)의 부탁으로『삼봉집(三峰集)』의 후서를 써주면서, 삼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고 한다.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그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박성일 저술가ㆍ문화해설가ㆍblog.naver.com/geochips

<사진설명=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2리에 위치하고 있는 삼봉 정도전 사당(위)과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조선개국의 으뜸공신인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시문과 글을 모은 삼봉집 의 목판(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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