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가을 단풍이 절정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일제히 노란 제복으로 갈아입고 사열에 들어 있다. 당당하고 일사분란하다. "받들어 총"/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바람이 인다./ "충성" / 집 앞 길가의 은행나무 아래 황금 빛 은행 알이 와르르 쏟아져 엎어진다. 차도 쪽으로 떨어진 녀석들은 자동차에 갈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져 진물이 낭자하다.

 보도블록으로 떨어진 것들의 수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는 이미 구둣발 아래 짓이겨졌거나 다행히 온전한 몸을 유지한 것도 욕을 옴팡 뒤집어쓰고 있다. 고약한 냄새가 발바닥에 묻을세라 사람들이 까치발로 비켜가니 치욕적이다. 그 탓에 아름다운 은행잎은 싸잡혀 눈총을 받는다.

 은행나무 입장에서는 어쩌다 이리 천덕꾸러기가 되었나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나무들인들 환경 좋은 숲속에서 자라고 싶지 않았으랴. 부득불 길가에 심어 놓을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뭇매를 들이대나 싶을 게다. '살아 있는 화석'이란 별칭이 붙을 만큼, 우리 인류와 가장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나무가 아닌가.

 2억 년이 넘는 세월,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을 고수했다. 뼈대 있는 양반의 가문으로 남녀를 분명히 구분해 오고 있다.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운다 해도 함부로 키를 올려 열매를 잉태하지 않는다. 20여 년 은근히 저를 성장시킨 후, 혼례 올리듯 암수가 마주보며 사랑 나눔의 절차를 거쳐야만 비로소 자손을 얻는다. 오죽하면 공손수(公孫樹) 라 했을까. 이는 씨를 심어 손자 볼 즈음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하여 생긴 말이다.

 묵직하고 신중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결코 함부로 대할 나무가 아니다. 현재 많은 지자체나 학교에서 상징나무로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우리 진천군의 군목 역시 은행나무다.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선택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디에서나 잘 자랄 수 있고, 도심의 대기오염 속에서도 잘 견딜 수 있음은 기본이다. 벌레가 끼지 않고 대기 중의 중금속 물질을 흡수하는 정화식물이란 점이다. 한여름 적당한 그늘과 아름다운 단풍, 그리고 유실수라는 것이 한몫을 했다.

 불과 20~30년 전만해도 길가에 은행이 저리 천덕꾸러기는 아니었다. 은행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워갔다. 아니, 떨어지기도 전에 나무를 두들겨 억지로 떨어내기 일쑤였다. 우리 집 앞 은행나무의 경우, 하도 두들겨 맞아 겉껍질이 너덜너덜 해진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지자체에서 가로수의 열매 소유물에 대한 조례를 정해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한 것도 그래서였지 싶다.

 이즈음에는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삶이 윤택해져 그런 것인지. 중금속을 흡수한다하여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냄새나는 골칫거리로 전락한 것이 씁쓸하다.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한다느니 방법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필요한 사람들에게 은행을 주워가 활용할 방법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학창시절 책갈피에 꽂았던 추억의 노란 은행잎은 그저 예뻐서뿐만 아니라 책갈피 속에서 곰팡이와 좀벌레로부터 책을 보호하는 방부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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