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성
문화사랑모임 대표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이 노래를 보면 3.1운동에 관한 모든 것이 느껴진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민중들의 밀물같은 모습과 목숨각오하고 나선 독립만세운동은 의이고, 생명이고, 교훈이라는 본질이 명확해 진다. 그래서 이날을 길이 빛내야 하는 것이다.

3.1운동은 4.19와 6월항쟁에 비할 바가 아니다. 3, 4, 5월간에 1542회 집회, 202만명의 참가, 피살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구속 4만 6948명이라는 기록이다(박은식 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전국 곳곳 독립만세를 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 충북의 경우 봉화고변이라고 밤이면 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알리며 위협적인 시위를 하였다. 청주 읍내, 강내, 강외, 부강, 문의, 미원, 낭성, 내수며, 괴산 읍내, 청천, 청안, 장연, 소수, 도안, 보은 읍내, 산외, 수한, 삼승, 옥천 읍내, 이원, 청산, 영동 읍내, 양산, 학산, 황금, 황간, 매곡, 제천 읍내, 송학, 충주 읍내, 신니, 용원, 음성 읍내, 소이, 한천, 삼성, 감곡, 금왕, 맹동, 진천 읍내, 백곡, 광혜원 등 곳곳 장이 서는 날이면 모여 독립만세를 피토하며 외쳤다. 이 만세운동으로 당장 독립을 쟁취할 수는 없었다지만 일제의 무단통치 10년만에 조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다이나믹한 역동성으로 여실히 보여준 거사였다.

3.1운동은 단순히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10년 8월 직후 경기 산악지대에서 연기우 의병대와 강기동 의병대가, 황해도 재응언 의병대, 이진룡 의병대가 유격전을 벌였고, 태백산이며, 소백산맥 산간이며, 울진 영양 봉화 등지에서도 유격전이 이어졌다. 1911년 3월 박영신 의병대의 함경 경원 일군 수비대 습격사건, 1912년 임병찬의 독립의군부, 1913년 박상진, 채기중, 이관구의 대한광복회, 1914년 대성학원 비밀결사, 천도교구국단, 1915년 서상일의 조선국권회복단, 선명단, 1916년 한영서원 학생비밀결사, 자립단, 1917년 장일환의 조선국민회, 1918년 이증연의 중심의 비밀결사 등 끊임없는 항일투쟁이 이어졌던 결과인 것이다.

또한 3.1운동의 거사는 그 선전지인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2호(1919년 3월 3일자)에서 국민대회를 거쳐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을 밝혔다. 이 성과의 하나가 한성임시정부의 제창. 수립이다. 3.1운동은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톡, 만주, 상해, 미주 세계 각 곳 조선민중들이 있는 곳 어디라도 뭉쳐서 함께 했고 그곳에 대한국민회의(블라디보스톡, 이상설), 중국 만주지역의 고려임시공화국, 천도교의 대한민간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등이 생겨나면서, 이 결과로 상해에서 국내외 민족단체와 대표들이 모여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하였다. 상해임정의 수립에는 우리지역 청원 가덕 출신의 신규식 선생이 큰 역할을 하였다. 1911년 상해로 망명하여, 민족단체 동제사를 결성하고 박은식선생과 신채호선생을 모셔 박달학원을 세워 민족후학을 양성했고 손문 등 중국혁명동지들과 신아동제사를 결성하며 일제에 대항하는 동아시아 연대를 통해 조선독립을 도모하였다. 더욱이 1918년 3.1운동 거사를 계획 주도한 상해의 신한청년당(여운형, 장덕수, 조봉암, 조동우(옥천))의 기반을 마련하게 하고 도운 사람도 곧 신규식 선생이었다. 이 또한 우리의 긍지요 자랑이다.

일제 통치 40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1940년대, 일제에 따르고 협력하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가 변절을 합리화하고 생계형 친일을 항변하는가. 이 암흑세상에서도 비밀결사를 통해 민족해방과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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